― 틈새로 들어온 사람
건축가와 건축주 01.
― 틈새로 들어온 사람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사무실 회의실이었다.
도면 위로 비치는 겨울 햇빛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는 낡은 트렌치코트 안에 검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그리고 어떤 질문도 서두르지 않았다.
“창문은 꼭 남향이어야 하나요?”
그녀가 처음 한 말이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꼭 그렇진 않죠. 바라보는 것보다, 바람이 드는 방향이 더 중요할 때도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좀 멋지네요.”
이상하게, 나는 그 순간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이혼 후 혼자 사는 집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 커서 나가 살았고, 이제는 혼자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면 좋겠어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공사 중엔 몇 번 더 마주쳤다.
현장 미팅, 가구 선정, 조명 밝기 조율.
그럴 때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말했고,
말보다도,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을 더 자주 나눴다.
나는 그녀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정함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그걸 감추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사람.
그녀의 표정은 늘 잘 정리되어 있었고,
가끔씩 헝클어진 머리카락만이 그 정리된 삶의 균열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한 번은 퇴근길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조명 시공 일정이 하루 미뤄졌습니다. 내일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그녀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괜찮아요. 기다릴 줄은 아니까.”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하나 더 문자가 왔다.
“혹시… 맥주 좋아하세요?”
우리는 종로의 낡은 포장마차에 앉았다.
말없이 두 병쯤 마시고 나니, 그녀가 불쑥 말했다.
“사람이 나이 들수록, 기억이 아니라 순간에 더 기대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이 이해됐다.
“그래서 순간을 잘 지어야 하죠. 기억은 늘 왜곡되니까.”
그녀는 웃었다.
“건축가다운 말이네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건축가도 그냥 외로운 사람일 뿐이에요.
벽 대신 사람한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 후로도 가끔, 아무 일 없이 그녀와 잠깐 만났다.
비 오는 날 카페 창가,
철거 전의 낡은 주택 골목,
혹은 그냥 지나가는 길목에서.
우리 사이엔 명확한 언어가 없었다.
누구도 묻지 않았고,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언의 시간들이 쌓여,
어느 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내 집의 테라스 같은 존재구나.’
늘 닫혀 있지만, 마음이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열 수 있는 문.
멀리 나가지 않아도 바람이 스며드는 그런 장소.
집이 완공되던 날,
그녀는 내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 집은 오래오래 쓸 거예요. 누가 다시 와서 고쳐야 해도, 전부 고치진 말아 주세요.
이 벽의 크기나, 창문의 위치 같은 것들… 다 그날의 감정으로 만든 거니까.”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