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에게
아내는 내가 쓴 것을 먼저 읽는다.
고른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어느 날 보니 그 자리에 있었다.
선택한 적 없이 그 자리에 있어온 사람. 오래된 강요는 어느 순간 이름이 바뀐다.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아내는 아직 거기 있다.
어디서든 쓴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그 순간 그곳이 나의 책상이다. 갈 곳을 지나친 적이 무수하다. 문장이 먼저 가면 나는 그것을 따라간다. 내릴 곳을 잊은 채.
새벽에도 쓴다.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 확인이 왜 필요한지 나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 깨어 있으면 문장이 기운다는 것을 안다.
읽힐 방향으로. 이해될 방향으로. 아무도 없을 때 문장은 다른 곳으로 간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낸다. 일하는 아내에게. 지금 당장 읽고 평해달라고. 강요한다. 강제한다.
아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보낸다.
아내는 대강 읽지 않는다. 온 심력을 다해 읽는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썼는지 알기 때문에. 쓴 나만큼의 무게로.
그것이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보낸다. 그것이 이 헌정사를 쓰는 이유다.
밥상에서도 거실에서도 소설 속 인물 이야기를 꺼낸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인물이 어디로 가는지, 왜 그 선택을 하는지, 그 장면에서 무엇을 지워야 하는지.
한참 듣다가 아내는 말한다. 기가 빨린다고. 그러면서 듣는다.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는 그 문장들을 읽는다. 아무도 없을 때 간 곳까지.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아마 그래서 거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산문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소설가다. 소설을 쓰다 보면 소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들이 쌓인다. 왜 이 문장을 지웠는지. 왜 여기서 멈췄는지. 왜 그 인물에게 끝내 언어를 주지 않았는지.
소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지우고 멈추고 주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여기 쌓였다.
순서는 없다. 체계도 없다. 어디서 읽어도 된다. 다만 읽다 보면 어떤 작가가 어떻게 고민하는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선언처럼 읽힐 것이다. 그것도 괜찮다.
이 글들은 계속 쌓일 것이다. 내가 성장하면 이것들도 그럴 것이다. 더 벼려지고 더 정교해질 것이다.
그래서 헌정사가 앞에 있어야 했다.
끝에 두면 완성처럼 보인다. 이것은 완성이 아니다.
진영은 이것도 먼저 읽을 것이다.
온 심력을 다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