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인다

I. 핵심

by leehyojoon ARCH

I. 핵심

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인다


쓰는 것이 즐거운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즐겁다. 그런데 그것이 이유가 아니다.

즐거움으로 쓴 문장은 가볍다. 가벼운 문장은 독자의 손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읽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읽히고 나서 손 안에 남는 것. 설명할 수 없는 채로 남는 것. 무게로 남는 것. 그것을 위해 쓴다.



글이 먼저 간다.



내가 설계하기 전에. 내가 어디로 갈지 결정하기 전에.

버스에서 내릴 곳을 지나쳤다. 지하철 환승역을 놓쳤다. 문장이 먼저 갔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추격자였다. 그 세계 안에서 이미 발생한 압력과 중력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추격자.

설계자가 아니라.



설계할 때 나는 독자를 생각한다. 읽힐 방향으로. 이해될 방향으로. 문장이 기운다.

기운 문장은 목적지에 닿는 순간 끝난다. 잔여가 없다. 독자의 손은 비어있다. 이해했으니까. 이해한 것은 손에서 빠져나간다.



따라갈 때는 다르다.



문장이 팽팽해진다.

목적지를 모른 채 버티기 위해. 그 팽팽함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자른다. 의미가 끝나서가 아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내가 아니라 문장이. 그 절단면에서 잔여가 발생한다. 논리로 수거되지 않는 것들. 구제받지 못한 채 남는 것들.

독자는 그것을 손에 쥔 채 멈춘다.



이해한 것이 아니다. 멈춘 것이다.



그 멈춤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가슴이 먼저 안다.

이 문장의 밀도가 무너졌는지. 눈으로 보기 전에. 논리로 따지기 전에. 조여오면 오류다.

호흡이 막히면 그 문장은 거짓이다. 그때 삭제하지 않는다. 삭제하면 그 무게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압력을 옮긴다. 그 문장이 감당해야 했던 무게를 다른 문장으로 전이시킨다. 상태값의 재배치다.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다. 형태를 바꿀 뿐이다. 어딘가의 문장이 그 무게를 떠안는다. 그래서 더 팽팽해진다.



이것들을 배운 것이 아니다.



쓰다가 몸으로 알게 된 것들이다.

몸이 기억한다. 어떤 문장에서 숨이 막혔는지. 어떤 문장에서 손끝이 차가워졌는지. 그리고 안다고 말하는 순간 방법론이 된다.

방법론은 족쇄다. 족쇄를 차고 뛰라고 하면 뛰긴 뛴다. 하지만 글이 먼저 가지 않는다. 내가 먼저 간다. 그러면 문장은 죽는다. 살아있는 문장과 죽은 문장의 차이는 단순하다.

살아있는 문장은 나를 끌고 간다. 죽은 문장은 내가 끌고 간다.



나는 방법론을 싫어한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이 방법론처럼 읽힌다면 내가 실패한 것이다.



소설을 쓰다 보면 소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들이 쌓인다.



왜 이 문장을 지웠는지. 왜 여기서 멈췄는지. 왜 그 인물에게 끝내 언어를 주지 않았는지. 처음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해서 지운 것이라고. 작가의 권한으로. 하지만 쓰면 쓸수록 알게 된다.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세계의 중력이 그것들을 밀어냈다는 것을.



어떤 인물은 끝내 말하지 못했다. 언어를 주려고 했다. 그 인물의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장이 거부했다. 그 세계가 거부했다. 그 인물이 처한 상태는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무너지는 것이었다.

침묵만이 그 상태를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침묵으로 남겼다.



어떤 문장은 끝내 소설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름다웠다. 정확했다. 하지만 그 세계의 밀도를 견디지 못했다. 너무 가벼웠거나 너무 무거웠다. 균형이 무너졌다. 그래서 잘라냈다. 잘라낸 문장들이 바닥에 쌓였다.



소설이 되지 못한 잔여들.



처음엔 그것들을 실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것들이 바닥을 만들고 있었다. 소설은 그 위에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기저. 침묵으로 가라앉은 것들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 산문들이 그것들이다.



일기이기도 하고 선언이기도 하고 고백이기도 하다.

순서가 없다. 어디서 읽어도 된다. 다만 읽다가 어딘가에서 걸릴 것이다. 절단면의 날카로움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채로.

그것으로 충분하다.



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인다.

그림자들이 생긴다. 나는 그 그림자를 따라가며 누가 버티고 누가 부서지는지를 기록한다.

누가 침묵을 선택했는지. 누가 침묵을 강요당했는지.

어떤 문장이 살아남았는지. 어떤 문장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는지.



기록은 계속 쌓인다.

이전 01화헌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