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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시즌2) 4회

by 정작가


드라마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정보를 알려줌과 동시에 현재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맥락을 알게 해 주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첫 장면은 바로 그런 드라마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긴장감이 흐르는 밤. 칼을 든 무사가 몰래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누군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주머니를 꺼내는 무사는 바로 무영. 세자의 다과를 훔치다 들킨다.


이 장면은 긴장 속에서 상황을 주시하게 만들고 곧바로 시청자들을 허탈감 속에 빠져들게 한다. 드라마 속의 이런 유머 코드는 극의 긴장감이 지속되는 피로감을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한편,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여태껏 무영이 세자에게 충실했던 이유와 과정을 설명해 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전 회차에서 무영을 안고 있는 자작나무 숲에서 있던 장면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급하게 영상(조학주)을 마차에 눕히고 성으로 향하는 부사와 서비. 서비는 그동안 보아왔던 역병 환자(좀비)들의 습성을 차근차근 되뇌어 본다. 불과 물에 대한 의문. 여기서도 과거의 기억들은 국면 전환의 기회로 활용된다.


조학주가 좀비가 된 안현에게 볼을 뜯기고도 좀비가 되지 않는 상황, 서비에 조학주가 살아난 것이 역병 환자의 몸에서 벌레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점, 그렇게 살아난 조학주가 중전에 의해 독살당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조학주라는 캐릭터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조학주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크기도 하거니와 다른 인물들과 견주어 그 비중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목적일 수도 있다. 조학주가 좀비가 된 안현에게 물리고도 역병 환자 되지 않은 이유를 작가는 서비의 입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본다면 그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낮에 나오기를 꺼려했던 역병 환자들이 온도를 이유로 낮에 출몰하는 과정도 엄밀한 논리의 잣대로 보면 다소 이해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을 시청자들이 개략적으로 용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합의 하에 극이 진행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억지논리가 아니라면 굳이 그런 것에 시비를 걸 시청자가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킹덤>에서 보이는 상황을 보면, 갑작스럽게 상황이 반전되고 중언부언 배우들의 입을 통해 이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진작시키는 측면에서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극의 밀도를 느슨하게 한다는 단점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면 <킹덤>에서 다소 무리한 느낌이 드는 설정을 좀 더 논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조정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물에 조학주를 담그는 부사와 서비. 연가시처럼 조학주의 얼굴 상처를 뚫고 사람 몸에서 나오는 몇 마리의 벌레들. 이 장면에서는 당연히 영화 <연가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연상작용은 영화를 통해 이미 익숙한 장면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물을 두려워하는 숙주의 운명을 가진 좀비의 상황을 해석하는 측면에서 보면, 이미 알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는 기법은 진부한 설정이라기보다는 공감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들을 품에 안은 중전. 그 표정이 차갑다. 극에서 배우들의 표정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이번 회차에서는 특히 중전의 표정은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중전과 영상(조학주)과의 대화에서 중궁전 내실을 찾은 조학주에게 아기를 안고 있던 중전이 ‘원자예요’라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각인된다. 또한 조학주를 죽이기 위해 찻잔을 따르면서 그의 표정을 주시하는 장면과 차를 마시는 조학주를 보는 미세한 표정의 떨림 속에서 예리한 시청자들은 음모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표정 연기는 극의 흐름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나올 수 없다. 중전 역을 맡은 배우 김혜준의 연기가 전 시즌에 비해 극찬을 받았던 이유는 이런 디테일한 연기를 충실히 소화했던 이유 때문일 것이다.


궁에서는 중전이 왕자를 낳았다는 신호가 울리고. 내선재에서는 임산부들의 시체를 옮기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는 중전의 음모가 드디어 성공하고 마무리 지는 상황을 간결하게 대비시킨다. 이 현장을 급습한 세자와 영신은 더 이상 그런 성공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리는 반전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중궁전과 살인 사건의 연관성을 조정의 신하들과 논하는 대신. 이들의 설전. 이때 나타나는 조학주.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심을 조성하여 대신들을 제압한다. 그의 말에는 정당한 논리가 없지만 그는 권력의 힘으로 대신들에게 어영청 대장의 삼족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정당성이 없는 권력자에게 공포는 가장 큰 힘의 근원이다.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조학주의 명령으로 줄줄이 잡혀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시장의 백성들은 목도한다. 국가의 공권력이 사익과 결부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가권력의 최상부를 겨냥해 칼을 빼 든 어영청 대장의 식솔들이 역적의 무리로 몰리게 되는 경우는 단순히 드라마의 상상력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억울한 사례는 실제 근대나 현대 한국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드러난다. 이는 국가권력이 사적인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과거의 아픔을 곱씹게 한다.


이번 회차에서 가장 큰 사건은 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조학주의 죽음이다. 영상인 조학주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그야말로 영상미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억새풀이 자리하고 있는 벌판에서 펼쳐지는 장례 행렬은 기울어 가는 권력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낸다. 장례 행렬에서 화면의 맨 끝 구석에 자리한 상여라든지 뉘엿뉘엿 넘어가는 기울어지는 해의 모습은 권력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조학주의 퇴장은 극이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려준다.


세자가 섬에서 살고 있는 당숙 뻘의 친족을 만난 것은 그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로 섬긴다는데, 이놈의 나라는 개판이요, 개판”




시전에서 부사와 서비가 얘기를 나누던 중. 영신을 발견한 서비. 몰래 그의 뒤를 쫓는데. 갑자기 그를 낚아채는 영신. 무영의 부인은 결국 한양성 인근 서원에서 서비의 간호를 받게 되는데. 갓난아이를 빼앗긴 무영의 부인은 제정신이 아니다. 밖에서 세자를 대면한 서비. 생사초를 보여주며 벌레의 실체를 알려준다. 드라마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기’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지만 여기서는 벌레가 생긴 근원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이런 친절한 시도는 아무래도 시청자들을 염두에 둔 포석일 가능성이 크다. 드라마는 시청 연령대가 다양하기 때문에 한 장면 속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담게 되면 시청자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고로 때로는 대화의 형식을 빌어 특정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할 필요도 생긴다. 연령대가 확연히 정해진 영화라면 그 연령대에 맞는 복선과 암시, 추리 등의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관객들에게 기회를 주지만 십수 회가 기본인 드라마와 같은 경우는 매회가 하나의 완성된 극으로서 자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어 한두 회차만 본 시청자라도 얼마든지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전회차나 전 전회차를 봐야 상황을 알 수 있게 만들어 버리면 흐름이 끊어질 우려를 감안한 측면도 있다.


“고작 이 작은 벌레였구나, 이 작은 벌레였어.”


세자 창의 이 말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듯이 아주 작은 원인이 큰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현실 상황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세자는 역병 환자들로 인해 나라가 거의 쑥대밭이 된 상황이 고작 몇 마리의 작은 벌레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는 한나라를 망치는 것은 백성이 아닌 소수의 기득권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코로나19 또한 그 원인이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 우한의 한 실험실에서 기원설을 찾는 주장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기에 그런 병증이 전 세계를 강타했던 것은 너무 기막힌 우연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 시기의 콘텐츠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역병에 걸린 환자를 소재로 한 한국형 좀비 드라마인 <킹덤>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를 찾아내는 일 또한 시청자와 비평가들의 몫은 아닐까? 주어지는 콘텐츠를 그냥 수용하기보다 좀 더 비판적인 측면에서 해석하고 개인의 삶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식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아버지가 그러했듯, 나도 저것들을 이용해 권세를 누릴 것이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중전이 한 이 말은 조학주의 죽음으로 인한 권력의 대물림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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