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 포틀랜드, 또다시 아프리카를 준비하는 한달살기
2016년 4살 겨울 제주에서의 한달살기 덕분에 2019년 7살 가을 미국 한달살기가 더 풍요로웠습니다. 처음이라는 설렘이 두 번째의 여유로움으로 변한 시간들 속에서 우리 가족 셋을 발견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주 :)
아이의 속도대로 느린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작지만 소중한 여러 가지를 발견했다. 그동안 잊고 지냈거나 미처 몰랐던 말, 표정 그리고 행동들을 보며 이런 일상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 행복하다고 여겼다.
#아이는_벨롱벨롱하다
제주 방언으로 벨롱-벨롱이라는 단어가 있다. '반짝반짝'이라는 뜻인데 제주의 유명한 플리마켓인 벨롱장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말이 참 예뻤다. 우리 집에 가훈을 만든다면 '매일매일 벨롱벨롱'하다 이면 좋겠고, 꽁이가 걸어가는 길도 벨롱벨롱이면 싶었다. 존재 그 자체로도 반짝이는 사람, 그리고 매일 반짝이는 삶을 사는 사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는 집 앞 밭에 심긴 브로콜리, 비트에도, 지나가는 길고양이에게도, 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와 꽃들에게도, 매섭게 지나가는 눈 비바람에도 다정한 말과 표정, 행동을 보였다. 4살의 눈으로 마음으로 보는 세상에 나 역시 물들고 있었다. 제주에서 돌아온 뒤 마흔이 되면서 만난 두 번째 이십 대를 나 역시 반짝반짝하게 살고 싶어 졌다.
꽁아, 엄마도 벨롱벨롱하고 싶어
#아이는_씩씩하다
걱정은 엄마가 할 뿐, 아이는 걱정이 없다. 딸을 키우며 오버다 싶을 정도의 걱정거리를 품다보니 엄마의 몸은 아기가 자궁 밖을 나가는 순간 걱정 세포가 대신 채워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첫날 모래놀이 이후 한달살기 가족들에 씩씩한 4살 꽁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어린데도 꿋꿋이 매일 모래놀이를 나가고, 눈보라 속에서 놀고, 비 맞으면서 오름 정상에도 오르고, 강풍에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고, 곽지해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에코데이 활동도 했다. 어쩌면 날씨가 조금 짓궂어도, 놀이터가 조금 지저분해도, 놀다 조금 다칠 수 있어도 아이는 엄마가 물려준 면역력 덕분에 튼튼하게 이겨냈다. 이젠 그 면역력을 물려준 엄마가 아이를 믿고 씩씩해질 차례다. 아이가 보여 준 씩씩함은 이후 포틀랜드에서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엄마는_고맙수다
레이지마마 안 조랑말 카페엔 엄마를 위한 공간이 있다. 주로 예전 한달살기 선배맘들의 추천 여정이나 깨알 같은 후기가 담긴 방명록, 앨범과 여러 장르의 책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주로 제주 관련 책만 골라 읽었다. 모래놀이를 하고 돌아온 뒤 아이가 마당 트램펄린에서 뛰거나, 퀵보드를 타고 논 뒤 일찍 잠들고 난 밤부터는 나를 위한 시간이다. 제주도 이민 성공담, 제주 여행책, 제주 에세이 등을 읽어 나갔다. 즉흥적으로 와본 이 낯선 섬에서 나도 정착해볼까 꿈꿨다.
제주에 산다는 건 어쩌면 일탈 같지만 실은 도피에 가깝다. 지겨운 직장, 지긋한 결혼에서 벗어나 아이와 단 둘 지내고 있는 이 여유가 좋았다. 여기라면 잃어가는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함께.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집값은 왜 이렇게 비싸지? 초등학교는 어느 지역이 좋을까? 그래도 애월에서 한 달간 지냈으니 이 근처가 좋겠지? 방과 후 수업으로 승마, 수영이 가능한 학교는 어딜까?' 나는 꽤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한달살이 동안 보통 세 종류의 아빠를 볼 수 있다. 아예 한 달 동안 같이 내려온 경우, 주말에 가끔 오는 경우, 마지막으로 아예 오지 않는 케이스다. 신랑은 주말에 두 번 정도 내려왔다. 낮엔 아이와 놀아준 뒤 밤엔 내가 본 제주 정착기를 열심히 따라 읽었다. 평소 보는 짜증 섞인 표정과 화내는 말투가 사라진 내 모습을 보니 "제주도에서 살까?"라고 물어왔다. "우리가 제주에서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되물었다. "책 보니까 해남(해녀), 중장비나 대형트럭 운전기사, 돌담 쌓기 같은 거 내가 배우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카페나 식당일이라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 정착의 꿈은 식은 냄비처럼 되어버렸다.
한달살이를 끝내고 김포공항에 내리는 날, 엄청난 미세먼지를 보고 우울해졌다. 제주도 돌아가고파.
이런 날이 있으니 제주가 더 고마울 수밖에.
#또다시갈게 #거짓말
돌아오자마자 해가 바뀌어 5살이 된 아이는 계속 레이지마마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여름휴가 때 놀러 가자. 레이지마마엔 못 지내지만, 바로 옆 펜션에서 지내면 조랑말 카페에도 가고 트램펄린 타고 놀 수 있어"라고 엄마는 약속했다. 그렇게 여름휴가를 인근 펜션에서 머물며 1일1모래놀이를 또다시 실천했다. 겨울, 여름에 왔으니 봄, 가을에도 와보자고 약속했는데... 아직 못 가고 있는 걸 보면 좋았던 여행지를 다시 가자고 하는 건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아마 포틀랜드도 그렇게 되겠지?
얼마 전 레이지마마 선흘타운 내 일주일살기 집들이 겨울 비수기를 맞아 할인 프로모션 하는 걸 봤다. 또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