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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May 16. 2024

미나리 묵은지 삼겹 볶음밥

제철 채소, 제철 고양이

일러스트 by 최집사



새벽에 폭우가 쏟아지더니 거짓말처럼 화창해졌다. 벼르고 있던 이불 빨래를 해놓고 창밖을 보니 나무들이 이리저리 손을 흔들었다. 나한테 흔드는 게 아닌 줄 알지만 괜히 두 손 번쩍 들어 나도 흔들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지만… 냥이들은 그러려니 하는 거 같았다.



본격적인 여름을 맞아 채소가 풍족해졌다. 동시에 금방 시들해지고, 음식도 빨리 상해버린다. 재벌이 신상 백 고르듯 채소 가게에 가서 괜히 이것저것 담아 오는 병이 돋었다. 지난번 사다 놓은 햇양파와 단호박이 행여 썩지 않을까 다듬어 냉동고에 얼려 두었다. 두 식구가 매 끼니로 다양한 제철 채소를 맛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재고 관리가 필수이자, 가장 큰 숙제라 생각한다. 언젠가 직장에서 배웠던 3정 5S가 도움이 된다.



집안일을 하고 나니 오전이 훌쩍 지났다. 점심은 씻어둔 김장 김치로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하룻밤 물에 담가두었더니 신맛과 짠 기운이 빠져 요리할 맛이 난다. 냉동실에 얼려둔 삼겹살과 끝물인 미나리도 함께 꺼냈다. 양산 원동마을의 미나리 삼겹살을 떠올리며 고기를 먼저 구웠다. 노릇해진 타이밍을 적절히 캐치한 뒤, 총총 썬 김치와 미나리 줄기도 넣었다. 채소들이 자글자글한 삼겹살 기름과 만나 풍기는 향이 트러플 저리 가라였다. 굴소스로 간을 하고 식은 밥도 넣어 볶으니, 어디선가 뱃고동이 울리고 쉴 새 없이 아밀라아제가 분비되었다. 그릇에 담을 것도 없이 그대로 식탁에 올려 미나리 잎으로 장식하니, 바다 건너 치앙마이 분위기가 물씬 났다. 고수도 미나리과 식물이라고 하던데, 문득 영화 미나리에서처럼 아무 데서나 잘 크고 강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꾸리가 사냥 독촉을 하는 관계로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겠다. 지금까지 4번 넘게 주방을 다녀갔는데, 다음번엔 수갑을 가지고 온다고 했다. 어제 산 천 원짜리 다이소 낚싯대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꾸 흔들어 달라고 재촉한다. 좋은 아이템을 장착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피곤한 기분이 든다. 반려인은 나이트클럽 미러볼을 구해 천장에 달아보자 했지만 결국 그것도 내 손으로 돌리고 있을 거 같아 단념했다. 한편으로 새 잡고, 들판을 뛰어다녀야 하는 아이들을 데려놨으니, 집사로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중인가도 싶다.




https://www.instagram.com/reel/C7Ba8ogLyF9/?igsh=aG43M3h5eXp4dH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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