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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n 13. 2024

깨순 두부 파스타

초록의 위로

일러스트 by 최집사



채소가 풍족한 계절이다. 오이, 가지, 상추, 호박… 삼시세끼 넉넉히 먹으며 고라니 아니, 코끼리가 되어간다. 얼마 전 채소가게에서 산 2천 원짜리 깨순 한 봉지는 그 양이 어마무시했다. 분명 탱탱볼 만한 크기였는데 양푼에 담으니 램프의 지니같은 게 쏟아져 나왔다. 물을 머금고 미역처럼 부 푸른 대야를 내려다 보며 어찌 요리해 먹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반은 찌개에 넣고, 반의 반은 잡곡밥에 넣고, 나머진 두부와 갈아서 페스토를 만들었다. 콩국 같기도 하고 크림소스 같은 걸 파스타도 만들고, 버섯과 버무려 통밀빵에도 올려 먹었다. 일부러 좀 슴슴하게 했는데 향이 좋아 그런지 입맛이 돌았다. 오이도 곁들이고 얼마 전에 담아둔 장아찌와 함께 먹으니 토속적이면서 이국적인 맛이 났다.



 이런 게 2천 원의 행복일까… 천 원짜리 두 장으로 편의점 불닭볶음 컵라면 하나 정도 살 수 있는 오늘날, 귀한 만족이다 싶다. 덥고 습하고 벌레 많은 여름이지만 기꺼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가볍게 설거지를 건너뛰고 소파에 앉았다. 너무 더울 땐 소화도 잘 되지 않는데 채소를 먹으니 속이 편해 좋았다. 냥이들도 오침에 들고 나도 잠깐 눈을 감았다. 요즘처럼 더위가 절정인 시간엔 괜히 움직였다간 기력을 잃으니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진다. 눈을 감고 바다나 숲을 떠올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고 재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은 돈과 시간과 품이 든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불 앞에 서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다. 제련소 일꾼처럼 땀범벅이 되어 멘털이 후덜 거리지만 만들어 놓고 보면 이것만큼 나를 위한 일이 있을까 싶다. 운동과 수양처럼 요리도 영원을 단련하는 과정이다 생각한다. 두 식구 먹는 밥상에 다양한 재료를 올리는 건 무리지만, 적은 재료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생으로 먹기도 하고 데치고 볶고 삶아 보며 채소가 가진 무궁무진한 매력에 빠져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을 좋아할 이유는 이것밖에 없다. 한여름 신선한 채소 요리를 먹을 때면 더위, 습함, 모기, 벌레, 냄새, 자외선 등등, 둥둥 떠오르는 혐오의 마음을 거대한 초록이 덮고 다독여주는 마음이 든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8JhPJzP_d3/?igsh=bDBjYzdpbGx1bn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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