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집사 Jul 11. 2024

통오이김밥

장마철 입맛 요정



 아침을 차리다 국을 쏟았다. 어제 커피로 예습은 한 덕인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국자 꺼내기 귀찮아 냄비채 잡고 붓다가 그랬다. 이번에도 냥이들은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 바닥까지 흐를까 봐  본능적으로 배를 내밀었다. 소중한 뱃살을 잃을 뻔했다. 예전에 아이 둘 있는 친구가 뜨거운 돈가스를 손으로 잡고 싹둑싹둑 자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른인 된다는 건 종종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비소식이 없어 시내에 다녀올까 하다 귀찮아 동네 마트에만 다녀왔다. 모처럼 전시도 보고 카페도 다녀올까 싶었지만 그냥 주말에 해야겠다 마음을 접었다. 아프기 전에는 알바도 나가고, 주중에 한 번은 시내에 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요즘은 도통, 코로나 때보다 더 집콕 모드이다. 그렇다고 마냥 갑갑하거나 불편한 건 또 아니다. 이것도 예습의 효과인가… 냥이들의 사냥 시위가 고조되면 조금 곤란해지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백색 소음에 가깝다. 요즘같은 날씨에는 달팽이처럼 소라게처럼 집앞에만 빼꼼 거리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집-도서관-마트-시장을 벗어나지 않고 살다 보면 어쩌다 만난 낯선 풍경에도 관대해질 수 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와도 인사를 나누고, 장날에 옆 사람과 스몰 토크도 하고, 유럽의 어느 나라처럼 채소 가게 아가씨와 안부도 묻는 사이가 된다. 김규항의 ’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는 책을 좋아한다. 혼자가 된다는 건 수많은 나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이자, 타인을 그리워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생각한다.



바람이 좀 불어 창문을 열어두었는데 비 내리는 소리에 냉큼 닫아버렸다. 창밖으로 온천여행 온 아줌마들처럼 신나게 비를 맞는 나무들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제들은 좋나 보네… 지긋지긋한 비구름에 시큰둥한 기분으로 행주가 널린 건조대를 들이고 작은 초을 세 개나 꺼내 켜 두었다. 얼마 전 찍어 둔 파란 하늘 사진도 꺼내 보았다. 여름엔 한겨울을, 비 올 땐 맑은 날만 찾는 나는 정말 개구리가 될 운명인가 보다.



 5개 2000원 하던 오이가 장마철이 되니 1개 1200원 한다. 일주일 사이 급등한 오이 몸값에 지갑이 선뜻 열리지 않았지만, 내적 자아가 오이 김밥을 원하는 관계로 애지중지하며 데려왔다. 김밥을 좋아하지만 예전처럼 햄과 맛살, 어묵은 먹지 않는다. 처음엔 무슨 맛으로 먹지 싶었는데, 그 덕에 좋아하는 다른 재료를 더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여름의 오이를 좋아한다. 굳이 양념에 무치지 않아도 슬라이스 해 빵에 올려먹고, 채 썰어 콩국에 띄어먹고, 더울 때면 방망이처럼 쥐고 와작와작 씹어먹는다. 줄곧 먹었던 비빔밥이 지겨워져 오이김밥을 만들었다. 계란 지단과 함께 말아서 마요네즈 대신 병아리콩으로 만든 후무스를 곁들여 먹었다. 그 위에 마늘장아찌도 한쪽 올리니 10줄도 거뜬하겠구나 싶다. 입맛이 없다 없다 했는데 이로써 여름의 착각 있었다는 게 입증되었다.   


이전 18화 토마토 버섯 키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