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파괴
[2016년쯤의 기억]
형제의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모습에 마르고 닳아 아름다운 카파도키아, 헬레니즘의 뜨거운 햇살 아래 푸르른 페티예, 로마네스크의 새하얀 파묵칼레, 그리고 비잔틴과 오스만 문화가 조화를 이룬 이스탄불까지… 온갖 문화가 용광로처럼 뒤섞여 있는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의 터키는 이슬람 국가입니다. 이들 국가의 특징은 초승달이 국기에 곧잘 나타나곤 하는데, 초승달이 상징이 된 연유는 선지자인 마호메트가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었는 순간에 초승달과 별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으로 전해집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처럼 말이지요.
사실, 이슬람교에 대해서 막연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 폭력적이고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통점이 매우 많습니다. 구약과 신약도 인정하며 심지어 예수님조차 위대한 선지자로 존경합니다. 어쩌면 이슬람에 대해 무지했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선입견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터키 역사는 몽골계인 돌궐족이 지금의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대륙까지 거슬러가는 긴 여정의 역사입니다. 아나톨리아의 어원은 야생마가 많은 초원입니다. 즉, 광활하게 펼쳐진 그곳에 얼마나 민족들의 이동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수많은 민족과 나라가 차지하고 또 뺏겼던 땅입니다.
첫 주인은 최초의 철기 문명을 이룬 히타이트 제국이었습니다. 그 뒤 페르시아, 마케도니아를 거치면서 헬레니즘 중심의 문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지금도 터키의 서쪽은 아르테미스 신전터와 트로이목마의 역사적 배경이 되지요. 그렇게 수 백 년이 지나 터키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됩니다. 로마네스크 문화는 기독교를 박해했던 탓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카파도키아에 숨어 들어가 지하도시를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파괴 행위를 피해 또 다른 문화를 창조를 한 것이지요.
그렇게 거대했던 로마제국은 또 한 번의 파괴행위... 성상파괴 운동으로 말미암아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게 되고, 터키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비잔틴제국)의 거점이 됩니다. 오스만 튀르크가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전까지 말이지요.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비록 성상파괴 운동의 영향으로 수많은 조각상이 파괴되었지만 대신 엄청난 건축물과 모자이크 양식을 창조해 냅니다. 대표적으로 아야소피아 대성당이 있지요. 건축사의 관점에서 소피아 성당은 뭐랄까요... 굳이 비유하자면 피카소 같달 까요? 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펜덴티브 돔이라는 새로운 건축술을 발명하기도 합니다.
계속 터키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유는 여행 내내, 파괴 행위가 늘 창조 행위에 선행되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 로마네스크, 비잔틴, 이슬람 문화로 나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여지없이 파괴되고 또 새롭게 창조되었지요. 수 많았던 전쟁은 문화를 융합시켰고 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서 자주 보게 되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기하학적 타일 양식들 역시도 파괴의 산물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국교인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신 이외의 그 어떤 형태의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경외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꽃무늬와 패턴 양식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했지요. 만일, 과거대로 신을 우상화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문양들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창조의 사전적 정의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이라고 합니다. 작가가 글을 쓰면 창작이 되고, 회사가 생기면 창업이 되며,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면 창시가 되지요. 하지만, 신이 아니고서야, 완전한 창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과거의 경험이 쌓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냈겠지요. 창조라는 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조(創造)의 한자어를 보면 창(創)은 곳간(倉)에 칼(刂)이 있다는 뜻이지요.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요.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파괴와 상처가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20세기 경제학자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로 설명했지요. 슘페터는 생산성은 자본과 노동뿐만 아니라, 무형의 가치 또한 중요하다고 말이죠. 그런데 무형의 가치… 그가 말하는 알파 값이 대체 뭘까요? 일단 파괴하면 창조가 될까요? 이것저것 갖다 붙이면 새로운 무언가가 될까요?
대학시절 창조와 파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그때는 물리적 의미로만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창조를 위해 무언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가령, 번식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암컷의 먹잇감 바치는 곤충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창조는 '관심'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활동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새로움을 위해서는 관습적인 것들로부터 탈피해야 되어야 하는데, 이는 곧 관심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관심은 예전보다 나은 방법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 방법이 구습을 파괴하고 창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터키 여행 중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을 단 한 군데만 뽑으라면 주저 없이 이름조차 생소한 유츠 셀레펠리 모스크를 꼽겠습니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나 블루 모스크를 언급합니다. 건축에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은 터키 역사의 천재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역작을 보기 위해 에디르네 시에 위치하고 있는 슐레이만 모스크를 보러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작게 위치한 유츠 셀레펠리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오더군요. 굳이 비유하자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러 갔다가 그 옆에 위치한 이름 모를 성당에 더 싶은 감명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모스크를 구성하는 건축학적 핵심 요소들은 첨탑, 돔, 중정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모스크는 공통 양식을 따르는데, 이 모스크는 거의 모든 것이 새롭게 시도됩니다. 유츠 셀레펠리 모스크는 three balcony 모스크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개의 첨탑에 특이하게 3개의 발코니를 두어서 그렇지요. 이뿐 만이 아닙니다. 모양이 제각각인 첨탑들과 돔을 지탱하는 조적술, 내부 형태의 중정도 최초로 시도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을 위한 특별석도 없습니다. '신 앞에는 평등하다'는 대전제를 두고 고민한 모습과 '어떻게 하면 우상을 만들지 않고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탄생한 관심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탄생한 창조물은 500년이 지났음에도 동방의 작은 여행객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결국 창조는 관심의 결과물이 아닐까요? 관심이 결여된 파괴는 폭력일 뿐이지만, 관심이 포함된 파괴는 창조를 이룹니다.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은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너머에 새롭게 창조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무심코 지나가던 것들에 대해 한 번만 더 관심을 갖고, 지금의 주어진 환경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하는 것. 그리고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이며 슘페터가 말했던 알파 값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