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2021년 8월 29일 일요일, 비 온 뒤 갬.

by 고귀한 먼지
이렇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하찮은 게 아니란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8월 29일 일요일, 비 온 뒤 갬.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눈을 감고 뭘 쓸까 생각에 잠기면 역시 하지 못한 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후회, 아쉬움, 자책, 그리고 무기력.


이 감정들이 새로 시작될 한 주 동안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

글을 쓴다는 행위를 다르게 표현하면 일종의 심리치료, 아니면 자신만의 의식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만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하루의 마무리를 넘어 한 주의 마무리, 그리고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 이 시간에 달렸다.


와, 난 지금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구나.

뭐, 이렇게라도 나를 응원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말은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바쁘게 지냈다. 집이 그리워 업무를 마치자마자 고향으로 달려갔고, 토요일에 KBS아카데미 드라마작가 기초반 수업을 위해 서울에 다녀왔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완벽한 휴일을 보내고자 부지런히 여러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던 일은 내 침대에 누워 책을 읽은 일과 고향 동네 곳곳을 돌며 산책을 한 일, 이 둘을 꼽을 수 있다.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다. 아직까진 안개가 낀 풍경을 응시하는 것처럼 내용이 정확하게 읽히진 않는다. 그럼에도 번뜩이는 상상력과 가슴을 건드리는 문장은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추리 소설 형식을 빌려 도대체 누가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구성도 돋보인다. 무엇보다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오스만 제국 당시의 예술(그림)에 대한 작가의 지식과 당시의 예술관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점도 책을 읽는 시간을 의미 있게 해 준다. 지금 속도로 매일 꾸준히 읽으면 다음 주쯤 다 읽을 것 같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벌써 궁금해진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바람이 시원해 창문을 바라봤는데 흐림 구름이 사라진 파란 하늘의 모습이 멋있었다.


고향 집 내 방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바라본 하늘 모습. 비 온 뒤 갠 하늘의 모습이 청량하다.


저녁을 먹기 전에 산책을 다녀왔다. 충주천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재래시장까지 발걸음이 닿았고, 덕분에 오랜만에 시장 구경을 했다. 재래시장 한쪽에는 순대국밥 가게들이 늘어선 순대국밥 거리가 있는데 그곳을 지나치며 난 10여 년 전 아버지와 함께 순대국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던 추억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건 없는데 그저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장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면서 씁쓸했던 마음은 금세 녹아버렸다.

이렇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하찮은 게 아니란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집에 무사히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하루도 역시 감사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꼭 특별하진 않아도,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살아보니까 행복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대충 이런 거란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 다시 힘을 내서 내일을 살면 되는 거다.


오늘 못한 걸 내일로 미룬다고 너무 자신을 미워하지 말자. 대신 오늘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며 행복하지 않았는가?

축복 같은 하루에 감사하며 내일을 열심히 살자.


어떤가?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노트북 앞에 앉은 이 시간,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단 걸 이렇게 끄적이고 나니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고맙습니다.


고향 집 근처에 조성된 산책로. 서울 청계천처럼 복개했더니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변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는 청계천 못지않은 소중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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