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2021년 10월 3일 일요일, 맑음.

by 고귀한 먼지
누구 하나 답을 알려주지 않기에 일단은 그렇게 믿고 가는 수밖에. 그 길에 자꾸 멈춰 서서 시간을 허비하려는 나를 꾸짖으며 가는 수밖에.


2021년 10월 3일 일요일, 맑음.


오랜만에 서울 중심, 종로 구경을 했다. 오후 4시쯤 버스를 타고 사직단 앞에 내려 인왕산 자락길을 걷는 걸 시작으로 종로 일대를 걸었다. 내일이 개천절 대체공휴일이라 거리에서 만난 이들의 모습에 여유가 느껴졌다.


점심 먹고 몸이 나른해질 때까지만 해도 그냥 집 주변이나 걷다가 만 보를 채우면 바로 돌아올까 싶었는데, 지난주부터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거라 늘어진 몸을 일으켜 실행에 옮겼다.

결과는 대만족. 오늘 한낮 기온이 한때 30도에 육박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때마침 구름이 햇빛을 가려줘 걷기 그만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려 만 육천 보 정도를 걸었다.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은 인왕산 자락길을 시작으로 우선 윤동주문학관을 거쳐 청운중학교 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청와대 사랑채를 지나 청와대 쪽 경복궁 돌담길을 걸었고, 국립 민속박물관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국립현대미술관을 지나 감고당길로 들어갔다. 거기서 조선어학회 터와 인동교회를 구경하고 다시 인사동 거리를 걸은 후, 운현궁을 지나 청계천에 도착해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청계천을 걸었다. 청계천 시작점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시청 쪽으로 발길을 옮겨 걷다가 대한문 앞 시청역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땐 합정역에서 내려 저녁으로 먹을 삼겹살과 막걸리를 산 후 마포구청역까지 두 정거장을 또 걸었다.


인왕산 자락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모습. 날이 조금 흐렸지만 그래도 N타워가 보이는 거 보니 그렇게 나쁜 날은 아니었다.



종로 곳곳을 걸으며 ‘서울은 참 재밌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했다. 혼자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많은 사람과 높은 빌딩들, 그리고 600년 역사의 자취가 남은 곳을 둘러보는 건 그야말로 재밌는 놀이다. 세상에 사람 구경만큼 재밌는 게 또 없지. 나처럼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비롯해 모델처럼 키가 훤칠하고 어디서도 눈에 띌 사람들, 또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패션 감각을 뽐내며 자신 있게 거리를 걷는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모습만 보이는 건 아니다. 낙원 악기상가 근처에서 쪼그려 앉아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던 어느 중년 남성을 봤고, 서울프레스센터 앞에서는 때에 찌든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사람들을 피해 후미진 곳으로 걸어가던 노숙인도 만났다. 요즘 화천대윤가 뭔가 하는 이슈로 내가 몰랐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돈 잔치에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데, 새삼 내 눈으로 확인한 자본주의 시대 비정한 양극화의 실상은 좋았던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존재의 초라함이 일상을 잠식한다.

아직 무너지진 않았지만 위태롭다. 때문에 이 시기에 과거를 돌아보며 다시 가야 할 길을 가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았으니까.


내가 꿈꾸는 완벽한 세상을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는 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 일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누구 하나 답을 알려주지 않기에 일단은 그렇게 믿고 가는 수밖에. 그 길에 자꾸 멈춰 서서 시간을 허비하려는 나를 꾸짖으며 가는 수밖에.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결과는 그 결과를 향해 가는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그 과정에 있었나?

뭐, 종로를 홀로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그 시간이 내가 원하는 결과를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믿자.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이런 날도 필요하니까.

암튼, 오늘은 참 재밌고 의미 있는 하루였다.

푹 쉬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자.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도 고맙습니다. 내일도 열심히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