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5일 일요일, 맑음.
인간이 인간에게 상처 받고, 그 상처로 고통받고, 지워지지 않는 고통에 절망하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걸 딛고 나가야 한다.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와 좀 걸었다.
오전에 읽은 책 때문에 심신이 지쳐 햇빛을 좀 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남은 주말을 보낼 것 같았다.
가까운 동네를 걸으면 뭔가 찜찜할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6호선을 타고 한강진역에서 하차한 다음 1번 출구로 나갔다. 예전에 한 번 가본 남산 둘레길을 걸으려고 마음먹고 이곳으로 왔다. 대형 공연장이 근처에 있어 뮤지컬을 보기 위해 젊은이들이 출구 앞에서 많이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햇빛이 포근해 가벼운 옷차림에도 걷기 그만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곧 남산 둘레길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지만 이번엔 좀 다른 길로 걷고 싶어 계단을 지나쳤다. 조금 더 걸으면 다시 둘레길로 가는 길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쭉 걷다 보니 이태원역에 다다랐고, 에라 모르겠다 싶어 다시 쭉 걸으니 경리단길이 나왔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오랜만에 경리단길을 구경하며 좀 걸으니 다시 남산 둘레길로 향하는 표지판이 보여 그쪽으로 걸었다. 남산자락에 자리 잡은 주공아파트를 지나 계단으로 이어진 오르막을 오르니 남산타워가 한결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소월로였던가? 암튼 거기를 지나쳐 걸었다. 남산을 빙 둘러싼 차도와 그 옆에 조성된 인도를 걸으며 나는 남산타워의 모습을 여러 번 사진에 남겼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바람은 조금 찼지만, 햇빛은 포근했고 팔을 휘저으며 씩씩하게 걸음을 걷는 행동도 우울했던 감정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렇게 남산 둘레를 걷고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가로운 일요일의 오후를 꽤 의미 있게 보낸 것 같아 뿌듯했다.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2박 3일의 주말 동안 나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보냈다. 약간의 업무를 보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뉴스를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오늘 오후의 산책처럼 걷는 일을 뺀 나머지 시간은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오는 9일까지 2000자 분량의 서평을 써 응모하면 응모한 모두에게 2000점의 포인트를 준다는 인터넷 서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천천히, 그리고 자세하게 읽었다. 가을에 책을 주문해서 이미 한 번 읽었던 적이 있지만, 이번 기회에 천천히 읽으며 전에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와 내용을 확인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용은 무겁다. 제주 4.3에 관한 내용이기에 그렇다.
아주 얇은 막처럼 연약한 이성을 한 번 벗겨내기만 하면 여지없이 드러나는 광기. 인간의 본성. DNA에 새겨져 긴 시간 이어진 그 폭력과 파괴의 욕망.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인간이기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란 절망이 나를 괴롭혔다.
야만적인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도 서럽지만, 그 희생을 끝까지 보듬어 안고 가야 하는 희생자 가족들의 삶이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고통을 공감한다고 쉽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절대로 타인이 체험할 수 없다. 고통을 받은 이들의 외로움과 막막함을 결코 상상할 수 없다는 절망이 오전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이 절망은 그저 나만의 절망일 뿐이다.
아마 이번 주까지는 이 절망 속에서 쉽지 않은 한 주를 보내겠지. 그렇더라도 이 같은 고통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꼭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제3의 시선으로 진실을 꿰뚫어 바라보고 절망과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같은 야만과 광기가 다시 세상을 뒤덮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상처 받고, 그 상처로 고통받고, 지워지지 않는 고통에 절망하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걸 딛고 나가야 한다. 반복되더라도 단 하나의 변화를 위해 주저앉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게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였고, 앞으로도 이어질 인간의 역사다.
역사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얼마 남지 않은 휴일의 몇 시간은 조용히 이 물음에 답을 찾아보며 보내야겠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