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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pr 06. 2021

오직사랑하는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짐 자무시의 이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그리 좋은 감상법이 아니다. 모로코 탕헤르의 구불구불한 뒷골목을 걷는 이브의 뒷모습을 그렇게 자주, 오랫동안 보여주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아담을 찾아 디트로이트로 떠나기 전, 왜 오래된 책들로만 여행 가방을 채웠는지 의문을 갖는 대신, 그 책의 목록을 일별 一瞥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이브의 여행 가방 속 수십 권의 책 중 내가 읽은 것은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프란츠 카프카 ‘변신’ 정도. 주인공들 모두 사회적 외상으로 인해 타자화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사람보다 오래 살고, 사람의 피를 먹고 산다는 점에서 뱀파이어는 타자 중의 타자, 하지만 그들의 삶 또한 여느 인간들처럼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 

아담과 이브에겐 지난 시절이 좋았다. 두세 세대 전만 해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산책을 했고,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감응했으며, 시와 소설을 읽고, 과학과 철학의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악기를 만들고, 돌을 깎고 연마해 집을 지었다. 

당시 인간들의 피는 얼마나 신선했던가. 송곳니로 목덜미를 질끈 깨무는 순간, 목구멍 속으로 과즙처럼 흘러내리는 선혈, 그 따뜻하고 달콤 쌉쌀한 맛의 기억으로 지난 수천 년을 버텨왔다. 이제 인간들의 피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전율하지 않는 인간. 병든 좀비가 된 그들의 피는 대부분 오염되었다.

좀비들에 둘러 싸여있는 세계.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면 지긋지긋한, 지긋지긋한 삶이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 리볼버 탄환 1알이면 이곳을 영원히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수공으로 주문 제작된 것이어야 한다. 


아담이 사는 곳은 이미 몰락하고 쇠락한 도시 디트로이트. 일자리를 찾아 모두 떠나가고, 몇몇 좀비들만 남아 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춤을 춘다. 아담과 이브는 오랜만에 도시의 밤으로 외출한다. 차창 밖으로 천천히, 느릿느릿 밤의 풍경이 흘러가듯 이어진다. 부유하는 듯한 거리의 네온사인, 굳게 닫힌 건물의 옆모습, 희미한 빛을 발하는 가로등, 텅 빈 도로의 정적. 카메라는 몽유하는 듯한 거리의 풍경과 사람의 표정만을 집요하게 읽어낸다. 그 이미지들은 돌아갈 수 없는 어느 곳, 이미 지나쳐버린 어떤 시간의 절단면을 무심히 드러낼 뿐이다.


이브는 말한다. 우리 은하로부터 수억 광년 떨어진 어떤 곳에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난쟁이 행성이 있다. 가끔 그것은 무슨 소리를 내는데 지구의 징 소리와 비슷하다. 별은 권태롭고 우울할 때 다른 어떤 별을 그리워하며 운다.

사랑은 아날로그 시대가 남긴 쇠락한 이데올로기. 그래도 그것이 없으면, 그것의 그림자마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 없이는 춤출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세상 속에 섞이지 못한 모든 아담과 이브들이 그들이다. 세상은 무정하고 삶은 아름다운 것이어서, 멀리 있는 어떤 별은 징 소리를 낸다. 


#짐자무시

#오직_사랑하는이들만이_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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