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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pr 06. 2021

지중해의 영감

LA는 따뜻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J는 LA가 지중해성 기후라고 말했다. LA가 대서양 건너편 기후와 닮아있다니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기후인가. J와 나는 동시에 웃었다.

회의는 형식적이었다. 사장은 모두 冒頭에 가급적 짧게 보고해 달라고 주문했고 자주 손목시계를 훔쳐봤다. 그는 한국계 할리우드 스타 B를 연모하고 있다. 사내외에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체구는 다부졌고 눈빛은 깊었다. 이 바닥에서 그는 거인이자 하나의 신화였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는 흔들리고 있다. '크렘린'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자주 속내를 읽혔고, 이전과 달리 주의가 산만했다. 회의는 의례적인 사장 총평도 없이 예정시간보다 일찍 끝났다. B와의 저녁 약속이 예정되었으므로 호텔 객실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 코리아타운으로 달려갔다. 회의로 인한 긴장감이 풀렸는지 소주 몇 순배가 돌자 다들 취기가 역력했다. 말이 거칠고 억양도 높았다. 누구의 승진 뒤에는 누구의 빽이 있고, 누구는 이중인격자이며 누구의 업무 능력은 대리수준에 불과했다. 고기가 식어갈 때쯤 누구의 여성 편력과 사생활이 더욱 자세하게 폭로되었고, 또 다른 누구 빽의 실체도 구체화 되었다. 다들 엉망으로 취하자 누군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긴급제안이라며 단체로 백마를 타러 가자고 소리쳤다.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바로 들어갔다. 두런거리는 얘기 소리만 들려올 뿐 실내는 조용한 편이었다. 가끔 누군가 크게 웃었고 간혹 차량의 클랙슨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문득 창을 바라보자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렸다. 비에 굴절된 창밖의 풍경을 보며 지중해성 기후라는 J의 말이 떠올랐고 피식 웃음이 났다. 책 속에는 그곳이 사막과 태양, 빛과 정오 만이 충만한 곳이라고 씌어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마지막 주문을 받기 위해 웨이터가 다가왔다.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힐끗 보는 순간, 먼 구석에 앉아 있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는 얼음이 든 술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다. 사장이었다. 의외로 그는 혼자였다. 백열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지중해의 진짜 모습은 바람과 돌, 바다와 망각이다. 그곳의 하늘은 텅 비었고 사랑은 없다. 사장이 읽은 다른 책에는 그렇게 씌어있을 것이다. 한동안 창백하게 굳어있던 그의 표정에 순간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깊은 늪에 파선한 듯한 그의 모습이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 같은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지중해의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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