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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pr 06. 2021

봄을 기다리는 한 줄의 시

한 잔 걸치고 들어왔더니 집이 엉망이다. 소파 위에 옷과 책가지가 널려있고 거실바닥엔 세면도구와 블루투스 스피카, 잡다한 충전기 선들이 널부러져 있다. 아들은 커다란 이민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집어넣고 있다. 녀석은 며칠 후면 이곳을 떠난다. 귀환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이별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들이 가장 소중하게 챙기는 것은 외장하드. 영화 매니아인 그의 이른바 '인생영화' 수백편을 저장한 공간이다. 공유를 통해서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옛날 영화를 굳이 '소유'하려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감상적이고 즉흥적인 녀석의 심성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아빠 영화나 한 편 때릴까?' 기습적인 아들의 제안에 거절할 명분이 없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곧 내 곁을, 이 공간을, 이 나라를 기약없이 떠나지 않는가!  주방에서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는 사이, 녀석은 외장하드와 TV를 연결하고 있다.


Call me by your name. 배경은 이태리 북부지방 어디. 시점은 1981년 혹은 82년. 엘리오라는 십대 중후반의 지적인 소년이 30대 중후반의 올리버라는 사내와 함께하는 여름 한 철의 사랑.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간혹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언제나 이별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언제나 심한 육체적 통증을 수반했다. 아들이 없는 이 공간의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참으로 비현실적이다. 아직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통증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녀석은 스크린 야구를 한다며 야심한 밤에 또 밖으로 나간다. 설거지를 마친 후 영화의 여운을 담아 아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인생이란 20대의 어느 한 때를 가리킬 뿐 일평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머지는 사족이다. 어딜가든 싱싱한 관능이 살아 있기를. 네가 돌아올 때는 사월이었으면 좋겠다. 창 밖의 벚꽃이 피거나 질 때 늙은 아빠는 여전히 살아 있어, 여느 사월처럼 잇사의 한 줄 하이쿠를 읽고 싶구나.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에 살아있다는 것은'


※ 따옴표 속 문장은 장정일 소설 '구월의 이틀' 중 인용


#콜미바이유어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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