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마음 깊은 곳에 겨울잠 자고 있는 외로움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한 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앉아 가만히 멍 때리게 되는 날. 힘들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공허함과 외로움에 나도 모르게 축 가라앉는 날. 가족들과 함께 있는데도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쓸쓸하고, 오히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특별히 외롭다고 느낄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그런 날에는 유독 조용함이 크게 느껴진다. 가족들의 말소리로도 채워지지 않는 침묵, 고요함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감정.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괜찮지 않은 것 같은 마음.
혼자가 좋아서,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선택한 나의 삶이지만 언제나 홀가분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나도 모르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외로움은 가끔 불시에 찾아와 나를 뒤흔든다. 이 외로움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서 채워지지 않는다. 가족에게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아도, 친구들과의 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이 분명 존재한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 외로움은 나를 너무 초라하게 만든다. 그렇게 나를 한바탕 흔들어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얄밉게 다시 깊숙한 그곳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또 불쑥 찾아온다.
처음엔 이 감정이 너무 낯설었다. 이 감정을 처음 마주한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다른 때보다 유난히 즐겁게 놀았던 날이었다. 분명 5분 전까지도 깔깔 웃으며 헤어졌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갑자기 공허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낯선 감정을 만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방비한 상태로 맞닥뜨린 그 감정에, 그냥 무너져버렸다. 한참을 울고, 한참을 우울해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이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라는 것을.
몇 번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마주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부터 나를 초라하고 볼품없게 만든 이 감정이, 잘 살고 있는 나를 애써 무너뜨리려 하는 듯한 이 감정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다가 정말 평생 혼자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불안한 마음이 덮쳐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여도 괜찮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혼자서 해냈던 경험들, 혼자이기에 안정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해맑게 웃으며 지냈던 순간들, 따뜻했던 기억들. 일상 속에서 마주한 소소한 행복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나는 외로움도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외로움이 찾아온 그 순간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쿨하게 마주한다.
"응, 너 또 찾아왔구나."
외로움은 마음에 문제가 있어서 찾아오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올 수 있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애써 밀어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떠나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시 외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내 삶이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내 곁에 없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감정을 마주했을 뿐이다. 나는 이따금 찾아오는 외로움이 힘들지 않다. 아니, 가끔은 반갑기도 하다.
"오랜만이네! 이번에도 잘 이겨내 볼까?"
이제는 안다. 외로움은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는 걸. 그리고 가끔 깨어날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온다는 걸. 그때 충분히 놀아주고 보내면, 겨울잠 자듯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 거란 걸. 그렇게 나는 외로움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웠다. 나는 여전히 혼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