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독립 일기 10
독립한 지 딱 1년이 됐다.
그간 집을 장식하는 포스터 액자가 몇 점 늘었고, 화병을 늘어놓을 거실의 사이드 보드와 와인 마실 때 켜 놓을 조명을 추가 구입했으나 그것 말곤 집은 대부분 1년 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약속이 있다 말한 뒤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오래 방치되고 있는 음식들을 해치우거나 쉬는 날이면 이른 시간부터 와인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으나 그것을 빼면 대부분 1년 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아참, 회사 사람들에게 독립 사실을 공개했다. 이전과 확실하게 달라진 건 이 사실 하나다.
새 사장이 취임했고, 이후 사원 면담과 부서 개편, 인사이동이 진행된 어수선한 봄이 지났다. 개편된 부서에 따라 사무실 위치가 바뀌었고 새 팀에 적응하느라 개나리와 벚꽃을 만끽할 새 없이 더위를 맞이했다.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기만 하면 부동산이나 주식, 재테크 이야기뿐이던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몇 해 전 함께 근무를 했던 친분 있는 선배가 팀장으로 부임했다. 덕분에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부서가 되었다.
회사에서 떨어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나는 독립한 사실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신발 한 켤레를 산 것과 다름없는 듯한 말투로 무심히 밝혔다.
"저도 독립할 때 스타일러 살까 말까 엄청 고민했었는데 사도 몇 번 안 쓸 거 같아서 말았어요."
차에 함께 탄 팀원들은 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 쓰인 낯선 단어를 귀신같이 캐냈다.
"독립했어? 언제?", "그동안 왜 말을 안 했어?", "집은 어느 동네야? 왜 거기로 했어?", "00 동보다 00동 아파트로 가지. 00동 아파트가 가격 오를 만한 요소가 많은데"
업무와 관련된 대화나 회의 시간이 아닐 땐 부서 내에서 서로 많은 말을 건네지 않은 팀원들이라 이쯤이야,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그럼 집들이 한 번 해야지"
"그래 얼른 날짜 잡자"
결국 이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사적인 영역으로의 침범이 이토록 자연스럽다. 집들이는 집 주소와 생활의 궤적, 일상의 형태 등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아 공개하는 행위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미 결정 내린듯한 말투가 일정 부분 폭력적이게 들렸다. 독립한 지 꽤 돼서 집들이는 멋쩍다고, 집도 좁아서 불편할 거라고 한 뒤 대화 주제를 옮겼다.
독립한 지 딱 1년이 됐다. 독립 사실을 공개하기엔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기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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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회사 동료 둘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 낮에는 솥밥 정식으로 줄을 서서 먹는 밥집이 저녁이 되면 근사한 와인바로 변한다는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한 명은 저녁 아홉 시가 가까워져야 일이 끝나기에 남은 둘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았다. 내추럴 와인 한 병과 두 가지의 음식을 주문했다. 매번 쏜살같이 집으로 퇴근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터라 아주 오랜만에 바깥에서 먹는 저녁이었다. 조도를 낮춘 조명도, 조용한 음악도, 띄엄띄엄 앉은 손님도, 도란도란 들리는 말소리도 오랜만이라 더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게 서빙된 음식. 가끔씩 기분 내기 위해 시켜먹는 배달음식과 비교되지 않은 온도가 가장 좋았고.
한참 대화를 나누며 업무가 끝날 동료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오늘부터 지역 내 식당이 밤 10시까지 영업이 가능한 단계로 격상됐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곧이어 점원이 다가와 라스트 오더는 9시, 매장 내 머무르는 시간은 9시 50분까지 가능하다고 알려왔다. 마침내 셋이 함께 모인 9시 10분. 늦게 온 동료를 위해 서둘러 주문한 음식이 막 서빙되어 나온 시점이었다. 집에서 꺼내 올 와인 종류를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말했다.
"어차피 다 같은 시간에 문 닫아서 옮길 만한 식당도 없을 텐데, 저희 집으로 가서 와인 한 잔씩 더 하는 게 어때요?"
밤 10시 20분. 식당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 집에 금세 당도했다. 조용한 노래를 틀고 조명을 켰고, 꺼내온 샴페인 한 병을 각자의 잔에 쪼르륵 따른 뒤 잔을 부딪혔다. 다양한 주제를 넘나 드는 대화엔 며칠 전부터 모 선배가 자꾸 집들이 타령을 한다는 푸념도 끼어 있었다.
삶의 형태가 많이 달라진 친구들보다 흉 볼 직장 상사가 같은 직장 동료가 더 편해진 나이. 두 시간을 쉴 새 없이 떠든 뒤에야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택시와 대리 기사를 부른 동료들을 배웅하고 집을 정리했다.
1년 간 집에 초대한 사람들의 숫자가 손에 꼽힌다. 그마저도 두 번 이상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집에 부른다는 건 이런 거다. '내가 사는 게 어떻게 보일까' 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기대되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집에 와인을 많이 사다 두었다며, 배달되는 맛집을 찾았다며 우리 집에서 함께 먹는 건 어떠냐고 내가 먼저 묻는 일. 그 물음의 주체가 내가 되는 일.
이제 다섯 살이 된 조카는 우리 집에 오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하얀 욕조와 흰 벽지, 카펫이 깔린 거실이 자기 맘에 쏙 든단다. 퇴근해 집에 도착할 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걸려오는 전화.
"이모 어디야? 집이면 지금 놀러 가도 돼?"
다섯 살 조카도 집에 방문해도 괜찮을지 동의를 먼저 구하고 내가 괜찮은 때에 방문한다.
"아직도 집들이 날짜 안 잡았어?"
"글쎄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요. 제가 초대하고 싶을 때 말씀드릴게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타 부서 선배가 오늘 또 불쑥 꺼내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 제가 먼저 초대란 말을 꺼내기 전에 그만 해주세요.
저는 제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만 초대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