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스의 시간 이후,

한병철 읽기(13), 고통의 의미, 10월 15일 단상

by 김요섭


생략된 존재


철퇴를 맞아 둔탁하게 잘린 머리와 팔이 들판에 널브러져 있다. 흥건한 피와 누가 쏟았는지도 알 수 없는 내장이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유달리 붉은 황혼은 핏빛 대지가 하늘로 이어진 듯했다. '정신을 잃은 사이, 바로 생지옥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끔찍한 상황에 그는 신음소리마저 내지 못했다.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자신을 덮은 시체를 밀어내며 한참을 꿈틀거린다.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잠시 공중에 올랐다가 다시 자리를 잡고 쪼아댄다.


수없이 버둥거린 끝에 겨우 몸을 움직일 공간을 찾았다. 그는 왼팔 쇄자갑 사이로 깊게 난 자상을 눌렀다. 푸르스름하게 변한 피부는 질척하게 열린다. 피가 드문드문 나오는 사이로 흰 뼈가 드러난다. 묵직한 통증에 참았던 울음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생략될 수 없는 고통 속에 비로소 그는 머문다. 팔등으로 솟아오른 붉은 피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다.



지연된 죽음


살아남았다는 어떤 희열도 없다. 일어날 힘도 없는 상태에서 맞이할 밤은 온전히 늑대의 시간이 될 것이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죽을힘조차 없는 그는, 살라오처럼 지독하게 불운한 기사일 뿐이다. 까마귀 밥이 되기 위해 전장에 나온 이가 어디 있으랴. 혀를 깨물 힘도 없다. 검푸르게 부패해가는 몸처럼 느린 죽음을 견뎌야 한다. 순간 감각이 없던 몸의 곳곳이 절반의 통증을 호소한다. 되살아난 고통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맞이한다. 두 손을 묶인 채, 질주하는 말에 끌려가는 것처럼, 어떤 의미도 없이 대지의 횡포를 견뎌야 한다. 오직 죽음만이 그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없다면, 언어를 잃어버린 벌거벗은 몸에 무방비로 내맡겨진다.' -한병철



이룰 없는 꿈


"이름, 모를, 기사여"

그는 헛것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금방 아스라질 것 같은 엷은 소리는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목뼈가 부러졌는지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 너머에서 목소리는 다시 들렸다.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지.... 마시오."

'그럼, 어떻게...'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핏빛 하늘은 짙게 번지고 있었다. 붉은 대지가 자신의 피를 신속히 빨아들이기를 바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소, 대지는 당신을, 받을 것이오."

목소리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어떤 의미도 없는, 무로 향할 때, 그대의 마지막을 축제로 만드시오."

그는 어떤 대답도, 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직, 남은 힘이 있잖소. 망각의 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시오."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검붉은 대지와 죽어가는 황혼이 서로를 향해 침윤한다. 민둥산에서 날아온 검은 독수리는 그의 가슴에 올라앉았다.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두 발짝 앞으로 걷는다. 날카로운 발톱이 지나갈 때마다 아직 식지 않은 몸에서 피눈물이 솟아난다. 그의 눈두덩이에 독수리의 부리가 사정없이 박힌다. 한두 번 쪼아대더니 붉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든다. 무심한 날갯짓과 함께 꿀꺽 삼킨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나 심연은 보고 있다. 망각의 강 너머, 깊은 눈으로 주시한다. 그를 막아내는 물살은 점점 잔잔해진다. 어느새 잃어버린 강의 끝에 도착해있다. 시원인지 땅의 끝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무엇인가 둥글게 맺히기 시작한다. 점점 선명해진 둥근 고리는 하늘을 수놓는다. 그는 오색찬연한 무지개 꿈을 꾼다.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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