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넘어선 영웅
니체 읽기(6), 고매한 자들에 대하여, 9월 19일 단상
그의 피
끓어오르는 피가 빠르게 그의 몸을 순환한다. 그는 사자처럼 거칠게 다가간다. 자신의 피를 흠뻑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과 달리 그녀는 피 묻은 칼에 관심이 없다. 이토록 창백하게 여린 상대에게, 그는 난공불락의 성을 바라보는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전쟁에서 만난 적은 피의 온도가 다르지 않았다. 칼을 겨누던 순간, 그의 심장에 귀를 대고 있기라도 한 듯 두려움과 긴장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해한 적을 만난 그는 조바심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녀는 다른 심장을 가졌다.
'영웅에게는 아름다움이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제아무리 격렬한 의지로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넘치기도 하고 조금 모자라기도 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에게는 중요하고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 니체
그의 고매한 정신은 용납할 수 없다. 콧김을 내뿜고 울부짖지 않는 목덜미를 자르고 싶다. 날카로운 이빨로 새하얀 피부를 뚫어 자신의 피를 수혈하고 싶을 뿐이다. 뜨거운 심장을 빼내어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는 전투의 순간을 떠올린다. 칼이 자신의 두 팔이 되고, 그의 다리가 참나무처럼 대지를 지탱하던 기억을. 적의 심장을 찌르던 손목의 감각이 그를 북돋는다. 어깨 위로 쓰러진 적의 몸을 지탱하던 순간 상대의 거친 호흡과 마지막 심장 박동을 생생하게 느낀다. 적은 다름 아닌 나다.
'그의 용트림하는 열정은 아직 아름다움 속에서 잔잔해지지 않았다.' - 니체
그녀는 적이기는 하나 전사가 아니다. 사자의 열망은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다. 그의 포만은 울타리 너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자신 속 영웅을 잊지 못하는 격렬함은 거친 황소와 어울릴 뿐이다. 그의 하겠다는 의지는 불가능과 맞닿는다. 피 묻은 칼은 야생마를 벨 수는 있을지언정 그위에 올라탈 수는 없다.
영웅을 넘어선 영웅
잊어야 한다. 사자의 영혼을 떠나보내야 하는 망각의 시기가 도래했다. 피 묻은 칼을 씻으며 적의 피가 아닌 나의 피를 흘린다. 더 이상 레테의 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무거운 닻이 묶인 녹슨 쇠줄을 끊어낸다. 이제 배는 중력을 거슬러 움직여야 하며, 최초의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무한의 바다를 향한 새로운 출발은 비로소 시작된다. 키를 잡은 그의 얼굴에 순진무구한 미소가 퍼진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더 부드러워지지만, 그 속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더 강해지지 않는가... 영혼의 비밀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영웅이 영혼을 저버릴 때 비로소 꿈속에서 영웅을 넘어선 영웅이 그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