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을 허용하는 이미지 능력
김준산 읽기(2), 장 뤽 낭시, 10월 20일 단상
도착
희미하게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 그녀는 촛불을 켠다. 어두운 녹색 벽은 고흐의 사이프러스처럼 그을린 흔적을 가지고 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구석 어딘가, 잠시 드러난 것이 사라진다. 그녀는 그곳을 주시한다. 확실한 흔적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이 없지 않다는 것, 낯선 것이 도착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화의 결처럼 부드럽고, 촛불의 움직임처럼 미세한 떨림이기도 한 것을 그녀는 느낀다. 낯선 손님은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순간 좁은 창문 틈으로 밀려든 바람이 거실에 흩어진다. 불빛이 흔들리며 어둠이 다시 침윤해 들어온다. 빛은 중심을 잃고 깨졌다가 다시 심지 위로 솟구치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촛불을 향해 몸을 숙인다. 불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린다.
극단을 허용하는 이미지 능력
촛불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진다. 빛은 부드럽게 하늘거리며 손길에 닿는 듯하다가 고개를 숙인다. 심지 언저리를 그녀의 손이 느리게 휘젓는다. 데일 듯한 뜨거움에 잠시 들었다가 옆으로 흐르는 촛농에 손을 가져간다. 아직 식지 않은 열정이 그녀의 손가락에 옮겨 붙는다. 뜨거운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감싸 안는다. 이제 겨우 새살이 돋기 시작한 환부가 통증을 호소한다. 강렬한 화기는 상처 위로 전해진다. 그녀는 고통과 함께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일주일 전 화상을 입었던 손바닥을 펼친다. 촛농에 핏자국이 묻어있다. 새살이 올라오려던 불투명한 껍질에 붉은 것이 차오른다. 그녀는 상처 주변을 슬쩍 벌린다. 막이 찢어지며 경계가 무너진다. 열린 틈으로 비집고 나온 것은, 가장 날것으로 사랑의 빛깔이다. 빛과 어둠의 열정으로 탄생한 하얀 것과 만나 서서히 굳어간다.
살과 불이 맞닿는 극단을 허용하는 사랑에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고통의 순간, 환희의 열림은 생성된다. 완성의 순간 사라져 가는 그것은, 그녀의 손바닥에 유화의 흔적처럼 남는다.
'현재는 없는 듯 보이나, 없는 게 아닌 존재의 공통분모를 그녀는 믿는다. 낭시는 이를 외존(exposition)이라 정의했다. 외존은 실체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움직임이다."... 현실과의 관계를 극진히 여기고, 지치지 않으며, 공동체의 지평을 확장시키도록 애잔한 기다림까지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맥이다' -김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