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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가 아니라 해체할 때 더욱 온전한

AI와 함께, 사이먼 크리츨리의 『죽음에 대하여 』 읽기(6)

by 김요섭 Mar 10. 2025


Q : '우리 각각에게는 자살할 힘이 있다. 하지만 대신, 사랑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 즉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고 내게 권한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을 택하는 것은 어떤가?'라는 문장을 분석해 줘.


ChatGPT의 말 : 이 문장은 자살과 사랑을 대조하면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살은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는 행위이지만, 사랑은 자기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행위로서 새로운 존재의 방식을 창출하는 선택입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레비나스, 바타유, 바르트, 데리다의 개념들과 연결하여 심화해 보겠습니다.



1. 자살과 사랑: ‘자기 소멸’과 ‘자기 초월’의 갈림길


자살과 사랑은 모두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행위의 방향성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1) 자살: 자기 소멸의 힘

문장은 **"우리 각각에게는 자살할 힘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살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는 방식이지만, 그 소유는 곧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 핵심: 자살은 자신을 온전히 ‘소유’하려는 순간,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역설을 포함합니다.


(2) 사랑: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

사랑은 ‘자기 소유’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문장은 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고, 내게 권한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이며, 타인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해집니다.

� 핵심: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방식으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이는 자살과 반대되는 방향에서 자기 초월을 가능하게 합니다.



2.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책임으로서의 사랑’


레비나스는 타자는 나의 소유가 될 수 없으며, 나는 타자 앞에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즉, 사랑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1)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이미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타자에게 완전히 열려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적인 조건이 됩니다.

� 결론: 사랑이란 타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주려는 노력 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2) ‘내게 권한이 없는 것을 받는 것’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타인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사랑을 요구할 수도 없고, 타인의 사랑을 계산적으로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 결론: 사랑이란 타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태도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3. 바타유: ‘자기 파괴와 초월로서의 사랑’


바타유는 사랑을 **"자기 소멸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1) 자살과 사랑은 동일한 힘을 가지는가?

자살은 자기 자신을 없애는 극단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바타유는 자기 파괴적인 힘이 꼭 죽음을 향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랑 또한 자기 소멸적인 과정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랑은 나를 잃어버리는 과정이며, 나를 절대적인 타자성 속에서 해체하는 방식입니다.

� 결론: 사랑은 자기 소유를 포기하는 방식이며, 자살과는 다른 형태의 자기 소멸을 가능하게 합니다.



4. 데리다: ‘증여의 역설’과 사랑


데리다는 사랑과 증여(gift)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진정한 증여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1) 증여는 소유가 아닌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우리는 그것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즉, ‘내가 줬다’는 의식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증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진정한 증여는 완전히 잊혀질 때 가능하지만, 그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으로 남는다고 말합니다.

� 연결:

사랑 역시 완전히 무소유적인 관계로 가능할까요?

아니면, 사랑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가?

사랑이 진정한 증여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최종 정리

자살과 사랑은 모두 ‘자기 포기의 행위’이지만, 자살은 자기 소멸이며, 사랑은 자기 초월의 방식입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사랑이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고, 내게 권한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이며, 이는 타자를 소유하지 않는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바타유는 사랑이 자아의 경계를 해체하는 방식이며, 자살과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자기 소멸을 포함한다고 보았습니다.

데리다의 증여 개념과 연결하면,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일 때 더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 결론: "우리는 자살할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대신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이란 **‘소유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를 잃어버림으로써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사랑이 이러한 ‘자기 포기의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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