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에 빠져도 괜찮아! 굴러만 가면 어디든 가겠지!
티박스에 서면 그 짧은 순간에 사람들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생이 그렇듯 골프도 성격대로 치게 마련인 걸까? 라운딩 중에서도 특히 티박스는 마치 작은 무대 같은 느낌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 짧은 공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골프의 묘미이기도 하다.
먼저 가장 인상적인 사람들은 티박스에서 유난히 오래 머무는 사람이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냥 티박스에 선 채 잡은 그립만 꼼지락거리면서 멍하니 공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가 이제 공을 치고 내려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 친구는 마치 세상 모든 고민을 공 위에 쏟아놓은 것처럼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잔디 위에서 한없이 멈춰 있다.
멍하니 서서 아무런 기척 없이 티박스에 머물러 있으면 옆에서 “이 친구, 오늘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슬쩍 눈치를 살피게 된다. 마음속 갈등이 그린 위로까지 펼쳐진 모습은 그저 묘하게 웃음을 자아낼 뿐이다.
그리고 티박스에서 유독 존재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는 한 방의 신화를 꿈꾸며, “오늘은 진짜 제대로 한 방 날린다!”는 의지로 힘껏 휘두른다. 이 친구는 머리가 반질반질한 대머리인데 가발을 쓴다. 또 3대가 현역을 다녀와서 병역명문가로 인정받아 자부심이 굉장한 친구이다.
평소에는 가발을 쓰고 다니다가, 이상하게 골프장에 오면 언제나 가발을 벗고 온다. “왜 골프장에선 가발을 안 쓰냐”라고 물어봤더니, 그는 "바람이 좋은 날은 자연스러움이 최고지"라며 현인처럼 미소를 짓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친구는 가발과 모자, 두 개를 다 써야 할 필요가 없어서라고 내게 고백했다.
그 여유가 부럽기도 하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멋지게 샷을 한다. 하지만 막상 티샷이 엉뚱한 데로 날아갈 때면 다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래놓고 바람의 영향을 받아 그런 거라며 쿨하게 말하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 티박스에선 본래의 모습대로 자유롭게 치는 이 친구의 존재감은 그 자체로 골프장의 활력소다.
다음은 티박스에서 쉽게 예민해지는 사람이다. 이런 친구들은 자기가 칠 때 주변이 조용하지 않으면 아주 난리가 난다. 누군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눈치를 주며, “내 차례인데 왜 방해를 해?”라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이 칠 때는 본인은 그 자리에서 마음껏 움직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기도 한다.
남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는 이 부주의한 모습에, 그저 옆에선 참다못해 피식하고 웃음이 터질 때가 많다. 특히 치는 사람에게 공이 잘못 맞기라도 하면 “아, 미안. 방해될 줄은 몰랐어!”라며 어색하게 사과하는데, 사실은 그 모습 자체가 진지해서 더 재미있다.
하지만 모든 이가 티박스에서 긴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친구 중 한 명은 티박스에서 언제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그가 티샷을 자꾸 망쳐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한 후부터 그냥 “공이 가는 대로 두자!”라는 생각으로 치게 되었단다.
티샷이 잘 나가든, 엉뚱한 데로 가든 상관없다는 이 여유로움에 진정한 골프 철학이 담긴 게 아닐까 싶다. 마치 “인생은 늘 내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공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표정이 묘하게 멋있다.
골프장은 단순한 운동 이상의 무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 인내와 여유가 필요한 그 티박스에서 우리는 각자의 성격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한다.
긴장하고, 포기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티며 각자의 골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깨닫게 된다. 그렇게 티박스는 나의 거울 치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작은 돌에도 걸려 넘어지기 쉬운 게 인생이다. 하지만 결국 굴러가다 보면 도달할 곳은 어디든 있다.” 이 말처럼 골프도 인생도, 그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굴러가며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