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에 빠져도 괜찮아! 굴러만 가면 어디든 가겠지!
골프장에서 함께 걷는 동반자라는 건 단순한 운동 친구가 아니라, 인생의 깊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존재다. 실수하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고, 방향을 놓쳤을 때 옆에서 살짝 조언해 주는 그런 친구가 바로 황칠이다. 이 친구는 성이 황 씨인데, 70대 스코어를 치는 게 목표라서 붙여진 별명이다. 지금은 건강 문제로 90대 중반을 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드 위에서 여전히 당당하고 유쾌하다.
황칠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하다. 무역 사업으로 꽤 성공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암 진단을 받고 여러 차례 수술을 거치면서 건강도 무너지고 경제적 어려움도 겹쳤다. 그렇다고 지금 가난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상대적인 의미의 경제적 어려움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큰돈이 묶여 허탈함을 느끼지만, 황칠은 묵묵히 라운딩을 나온다. 그의 목표였던 70대 스코어는 지금은 아득하지만, 황칠은 스코어보다는 이곳에서 함께 걷고 웃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티샷을 날리고 나면 황칠은 유쾌하게 말하곤 한다. “자, 오늘은 또 어디로 날아가나 보자고!” 공이 벙커로 가든, 해저드로 떨어지든 그는 그저 웃으며 나에게 “이쪽으로 와, 저기 더 좋은 풍경도 볼 수 있겠다!”라며 손짓한다.
다른 친구들은 스코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황칠의 여유는 그저 묵직하다. 어느 날 내가 스코어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을 때, 황칠은 내 어깨를 툭 치며 “야, 공이랑 싸우지 말고 사람하고 친해져야지”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힘을 빼고, 나는 스윙을 다시 한 번 가볍게 날릴 수 있었다.
라운딩을 마치고 사우나에 가면 우리는 황칠의 흉터를 보게 된다. 그의 가슴과 배는 수술 자국들로 가득한데, 마치 잘린 길이 이어진 것처럼 꼬불꼬불한 흉터가 남아 있다. 한번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야, 흉터 보니까 너무 민망하다. 여기다가 나비 문신이라도 해서 덜 보기 싫게 하자!”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자 황칠은 가만히 웃더니 "야, 그럼 다 같이 하자! 멋지잖아, 4명이 함께 앉아 있으면 우린 나비파가 되는 거야! 근처에 아무도 안 오는 거지. 어때?"라며 장난스럽게 되받아치는 거다.
황칠의 그 여유와 유머는 참 대단했다. 몸은 상처투성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웃음으로 가득한 그의 모습을 보면, 나는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칠과의 라운딩은 매번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스코어에 집착하던 나에게 골프는 숫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었고, 무엇보다 삶의 고통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위안을 얻는다.
공이 어디로 날아가든, 길이 틀어지든, 그와 함께 걷는 이 시간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다. 황칠과 함께해온 과거의 세월은 길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켜켜이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
어쩌면 내가 죽을 때 황칠이 먼저 떠나 있을 확률이 크겠지만(그래야 할 텐데??), 그때까지 우리 둘이 함께 쌓은 기억은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않게 해줄 것이다.
“몸에 새겨진 흉터는 삶의 훈장이다. 함께 걸어주는 사람 덕에 모든 길이 의미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