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연필은 가볍다.
생각나는 대로 쓰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운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흔적은 남지만, 언제든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연필로 쓴 기록은
확정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습작 같고, 밑그림 같다.
가볍고 자유롭다.
그다음은 볼펜이다.
연필처럼 쉽게 꺼내지만,
막상 적기 전엔
한 번쯤 숨을 고르게 된다.
선을 긋는 순간,
그건 곧 기록이 된다.
지워지지 않는다.
좋은 말도, 미운 말도,
그날의 글씨체까지 남는다.
그래서 나는
볼펜을 잡을 때마다,
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말, 정말 남겨도 괜찮을까?”
“이 감정, 이 문장, 지금의 나를 닮았나?”
누군가는 말한다.
“볼펜은 불편해. 틀리면 못 지우잖아.”
맞다.
지우개로 문질러도, 수정테이프를 써도,
딱 보면 안다.
‘아, 이 사람 뭔가 지우고 싶었구나.’
지운 흔적도 결국 기록의 일부다.
하지만 나는,
그게 좋다.
지워지지 않으니까
더 신중해지고,
더 간절해지고,
선택의 무게를 견디게 된다.
그래서 볼펜은,
기억을 책임지는 도구다.
마음의 결심,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생각나는 것들의 메모.
모두 삶의 흔적이 된다.
심지어 시험지 답안을 쓸 때도,
“이게 진짜 정답이 맞겠지?”
온 우주의 기운까지 모아 적는다.
연필이 ‘흔적’이라면,
볼펜은 ‘선택’이다.
지우지 않겠다는 마음,
기억하겠다는 결심이다.
간혹,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진지할 때는
볼펜 대신 만년필을 꺼내게 된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망설이며,
거의 의식처럼 적어 내려간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럴 땐 알게 된다.
‘이 말은 정말 오래 남고 싶구나’ 하고.
그런 마음은
볼펜에게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천히,
볼펜을 꺼낸다.
조금 느려지더라도,
속도가 줄어든 만큼
생각은 깊어진다.
볼펜이 주는 약간의 엉섬함.
그러나 글씨는 엉성해도 괜찮다.
그 안의 마음만 선명하다면.
지워지지 않도록.
잊히지 않도록.
진심으로 쓰이도록.
그게 내가
볼펜을 쥐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