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ylor swift
할아버지를 할머니 곁으로 보내드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작은 옻칠상자 하나.
안을 열어보니 빛바랜 여인의 사진과 편지가 몇 장 들어 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모습에 할머니의 처녀 때 사진이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냥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궁금했다. 할아버지가 늘 옆에 두고 지내셨던 자개장 안에 고이 모셔뒀던 의문의 여성이.
편지에는 정갈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다. 이런 편지를 5~6장씩 쓸 정도라면 적어도 할아버지는 그분에게 있어 ‘아무나’는 아니었으리라.
편지는 “당신이 밉고 원망스럽습니다”는 말로 시작됐다.
사진 속 그녀는 할아버지를 ‘귀여운 당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날짜도 없는 편지. 대체 언제 쓰인 걸까? 할머니도 그녀를 알고 있었을까?
확실한 건 적어도 아버지는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했다는 점이다.
유품 정리가 1차로 끝나고 아버지와 삼촌, 고모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물건을 쌓아두시는 분이 아니셨지만 할머니를 일찍 여위고 난 후로는 물건이 점차 늘어나셨다고 한다.
할머니를 본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아주 미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조차 할머니 얘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 아니 할아버지는 좀처럼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분이셨다.
삼촌이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줬지만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귀여워해주셨지만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들어본 적 없기에.
내 표정을 본 아버지가 아까 찾았다던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건넸다. 내용을 훑어보니 그 여자 이야기도 있다고 하더라.
낡아서 바스러질 것 같은, 사진 한 장 없이 검정 볼펜으로 쓴 투박한 일기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삼촌, 고모가 담겨 있었다.
일기장으로 본 할아버지는 분명 문학소년이었다.
그리고 일기장 끄트머리에는 그 여자 이야기도 있었다. 할머니가 이걸 봤을까?
고모가 태어나고 일주일쯤 지나서 할아버지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고모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할아버지를 불러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녀왔다.
할아버지가 본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웠고, 활기찼고, 회사에서 능력도 인정받았다.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었고 잘 지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기를 길게 적지 않았고,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유품 정리 마지막 날. 버릴 물건과 남길 물건을 나누고 있는데 아버지가 할아버지 편지가 또 나왔다며 내게 건네셨다. ‘차영에게’라고 적혀있다. 분명 할머니는 아니다.
보낸 날짜는 할아버지가 그 여자를 만나기 전날이다. 아버지와 삼촌, 고모까지 생긴 마당에 할아버지는 무슨 편지를 쓴 걸까.
길지 않은 편지였다. 정갈한 글씨로 쓴 작은 편지지 한 장.
할아버지는 편지에 고마움을 담았다. 그녀를 알게 된 건 행운이었고, 만나면서 늘 즐거웠다고 한다. 그리고 못나고 부족해서 미안했다고.
할아버지가 왜 건네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어떤 여자가 이따위 편지를 받고 기뻐할까.
아버지는 편지를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궁금하지 않다고.
할아버지는 소중하게 간직했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좋을 편지다.
그리고 다 비우기로 했다. 그녀는 잊히지 않았으면 했지만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