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글거림’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자.
봄비가 내리던 목요일 오후 7시 20분. 한강이 보이는 어느 카페.
창가 쪽 자리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퇴근할 때 우산을 빌려준 사수 덕분에 머리는 젖지 않았다. 고맙다는 문자를 보낼까 했지만, 괜히 요란 떠는 것 같다. 다음에 보면 얘기해도 괜찮겠지.
비가 내려서 조금은 습한 기운이 맴도는 카페. 바닥은 얕은 흙탕물이 퍼져있고, 알바생은 카운터 옆에 대걸레를 세워두고 손님을 받고 있다. 알바생이 춥다며 무릎담요를 건냈다. 담요를 받아들고 조용히 받아들고 자리로 간다. 나갈 때 인사라도 하면 좋으려나.
친구 지혜의 등쌀에 못 이겨 나온 소개팅. 나의 연애와 네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물었지만, 지혜는 결코 그런 질문에 답을 할 인재가 아니었다. 저나 잘할 것이지.
그와 헤어졌다고 말한 내가 화근이었나. 헤어졌다고만 말했지만 지혜는 눈물부터 쏟았다. 그리곤 몇 주 후 괜찮은 오빠라며 자신과 10년 지기인 남자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그게 며칠 전 얘기.
그래도 이렇게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어디 있냐 싶어 밥이라도 살까 싶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평소에도 자주 사니까 크게 상관은 없으리라.
구두에 묻은 빗방울을 닦고 있는데 소개팅남이 도착했다. 나보다 3살 많다. 훤칠하게 생겼다. 늦진 않았지만 늦어서 미안하단다.
30분쯤 서로 호구조사를 마쳤을까. 그가 연락이 잘 되는 사람인지 묻는 이유가 궁금하지만 구태여 물어보진 않을 생각이다. 지혜가 하도 간청해서 나왔으니 3번 정도 만나면 충분하리라.
첫 만남에 밥은 좀 부담스러우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도 때마침 저녁은 먹고 왔다고 했다. 소개팅인데 밥을 먹고 오는 사람도 있나? 아무래도 좋다. 3번은 만날 거니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혜에게 대차게 까였다. 뭘 하고 온 거냐고. 뭘 하고 오긴 네가 나가라고 한 소개팅하고 왔지. 내뱉지도 못할 말을 삼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도 2번은 더 만날 거니까.
2번째 만남은 토요일 낮 홍대에서였다. 이번엔 그가 먼저 도착해 있었고, 밥을 안 먹고 왔는지 확인부터 하더라. 당연히 밥은 안 먹고 오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그는 주변에 적당한 식당을 알아뒀고, 파스타와 샐러드를 깨작거리면 우리는 2차 호구조사를 이어갔다.
‘잠수이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사라진 여자친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죽거나 실종된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만. 그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그가 이 말을 담담하게 내뱉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을까.
그와 만난 건 2번째지만 느낄 수 있다. 그는 말을 천천히 하고 단어를 고른다. 또 말하면서 은연중에 내 반응을 살핀다. 꽤 능숙하게. 그리고 난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상대가 안 좋았을 뿐이다. 다만 구태여 내가 그걸 얘기해 줄 필요는 없으리라.
식사를 마치고 걷자고 하니 그가 중요한 볼 일이 생각났다며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이제 끝인가 생각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퇴짜는 아니겠다 싶었다. 어차피 3번은 보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 ‘그동안 즐거웠다’는 메시지가 왔다.
어치피 지혜가 시켜 반 강제로 나갔던 소개팅이다. 아쉬울 건 없다. 하지만 지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혜는 분명 답답해하고 있다.
다행히 그가 나와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진 않았나 보다. 다만 지혜는 그걸 알고 싶어 한다.
어땠냐는 지혜의 물음에 난 뜸을 들였다. 뭐가 어땠냐는 건지.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지혜에게 설명해 줬다.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지혜는 마지막에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된다”고 했다. 더 나아갈 생각이 없는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말이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아니까.
벚꽃이 지고 매미 소리가 볼륨을 키워가는 토요일 오전 7시. 늦잠을 자고 싶지만 눈이 다시 감기지 않는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다. 부르는 사람도 없고, 나가야 할 곳도 없다. 지혜도 오늘은 비번. 요즘 소개팅남과 자주 어울리는 모양이다. 10년 지기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날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한강변으로 갔다.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이 드문드문. 나도 자연스레 동화된다.
30분쯤 분주히 걸으니 이마에 땀이 맺힌다. 편의점에서 물을 사 벤치에 앉았다. 맞은편 벤치에는 40대로 보이는 커플이 있다. 아이는 없고 강아지만 2마리.
남자가 여자에게 얘기했다. “같이 나와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여자는 말한다. “나도 함께 나와서 즐겁다”고. 강아지들은 연신 혀를 내밀고 헥헥거린다.
그런 대화를 5분쯤 듣고 있었을까. 저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부부면 같이 나올 수도 있고, 즐겁다면 어차피 표정으로 드러나니까. 구태여 저런 말을?
내가 두 커플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하지만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저런 건 연기로도 할 수 없으니까.
지난 2월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던 그와 나는 저런 그림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지만 더는 함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가 좋았지만 그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를 좋아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에게 “알겠다”고 했고, 그게 그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아니, 마지막은 아니다. 그는 그 뒤로도 종종 안부 문자를 보냈으니까. 적어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지혜가 소개팅남과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난 축하한다고 했다. 굳이 내게 소개해주진 않아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내 옆을 나란히 걷는 지혜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을 거라고. 넌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니까.
내 팔짱을 끼고 걷던 지혜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난 별 얘기 안 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