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이 낯선 순간
인생은 당연히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하다가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했으나 불만족스러운 경우도 있고, 원하던 목적지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왔으나 알고 보니 마음에 쏙 드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인생은 이처럼 정해진 길과 정답이 없기 때문에 두렵고 괴롭지만, 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재밌고 설렌다.
사소한 선택의 갈림길이 집약적으로 모여있는 시기,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이 굵게 한 줄기 뻗어있는 시기가 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다고 생각했던 선택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고, 인생을 뒤바꿀 것 같았던 커다란 선택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고 회상되기도 한다. 선택지가 많은 것은 축복이지만 나처럼 선택의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헤쳐나가려 노력하지만 늘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결정을 내 마음대로만 하겠다고 고집할 수도 없다. 내 취향대로만 선택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가장 괴로워지는 사람은 바로 나다.
결혼과 출산은 사소한 선택과 중요한 선택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정신없는 시기이다. 이 크고 작은 선택들로 인해 삶의 큼직한 방향성이 바뀌기도 한다. 그중에서 결혼은 '두 우주의 충돌'이라는 말처럼 또 다른 가족의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며, 출산은 '새로운 우주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결정을 하게 되지만, 나의 결혼이고 나의 출산이라 해도 모든 선택을 나 위주로만 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새에 새로운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들어오기도 하고, 새로운 물건을 선물 받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가치관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면서 삶의 방향이 바뀐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바뀌지 않는 삶이 있을까? 변화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결혼과 출산 후 싱글일 때의 모습을 전혀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가장 자주 교류하는 사람들 다섯 명'의 평균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여러 시기마다 이 다섯 명의 자리에는 밀물과 썰물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든다. 이 사람들은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모래 속 조개껍데기 같은 흔적들을 내 삶에 남겨놓고 떠나면서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기 계발 글에서는 이렇게 내 삶에 흔적을 남길 만큼 중요한 자리에 어떤 사람을 들이고 내보낼 것인가를 잘 선택하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오롯이 나의 의지만으로 선택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연이란 인간의 통제를 일부 받지만 파도처럼 불가항력적인 힘을 갖고 있다. 인간관계는 쌍방향이므로, 내가 어떤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내 곁에 둘 수 없다.
예전에는 내 취향이 아닌 선물을 받으면 고마움보다 난감함이 앞섰다.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마음속에 여유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마음속이 가득 차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누군가에게 낯선 선물을 받으면 선물을 준 사람이 이 물건에서 어떤 매력을 느껴 내게 선물해 준 것인지, 나는 이 물건에서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본다(이렇게 하려면 마음과 집을 잘 정돈하고 비워두어야 한다). 선물을 준다는 건 선물해 준 사람이 그 물건을 가치 있게 여기고, 상대방을 생각하며 상대방이 그 물건을 받았을 때 기뻐하리라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취향을 시도해 본다고 해서 모두 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가끔은 그것에서 의외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하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아 보관해 두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잘 사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을 선물 받으면서 출산 전 나의 모습과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선택지를 고르기도 한다. 하루하루가 즐겁지만, 문득 이렇게 지내는 나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낯선 나의 모습을 마주하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긴 시간의 고민 끝에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낯선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단, 내가 지금껏 가지고 살아온 고유의 가치관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 노력 중 하나로 이따금 예전 나의 모습을 사랑해 줬던 사람들을 만나 잠시 그들이 기억하는 내가 되어본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물건에 마음을 열되 '취향의 변화'보다 '취향의 확장'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