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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벗 Mar 28. 2019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어요

작은 말들에 상처 받는 마음

괜찮은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단지 감정 표현할 시간이 없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늘 감정의 고된 노동 속에서 살아갑니다. 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죠. 기분이 좋지 않아도 컨디션이 좋지 못해도 직장에서는 늘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감정을 속이고 미소를 머금고 웃으며 일을 합니다. 억지스러운 웃음과 긍정적인 생각은 행복과 건강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요. 저는 누구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일단 그냥 시작하면 돼!' 이 말을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그 말이 이끌어 낼 시너지 효과를 늘 기대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제가 늘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자기 할 말만 하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늘 마음속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저의 감정은 숨긴 채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 제 잘못이 맞습니다. 다시 진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괜찮은 척 업무를 진행합니다. 상급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상처 받기도 일쑤지만 그런 곳에 상처 받을 시간이 없고, 감정노동의 고민에 센티하게 빠질 여력도 안됩니다. 남들보다 빨리 인정받고 힘든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버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 정말 괜찮은 거지?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저는 늘 '괜찮아.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반복학습시키고 있습니다. 일단 별거 아니라는 말 자체에서 힘을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별거 아닌데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땐 정말로 제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들은 저와 비슷한 나이에 아파트를 사거나 땅을 사서 돈을 벌었다며 투자를 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제게 많은 가르침도 줍니다.  '어디다 투자 좀 했어?'라며 물어볼 때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주며 이야기합니다. "난 괜찮아.. 내 걱정은 안 해도 돼"라고 그리고 속으로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까짓 거 뭐 별거라고..'

시간이 갈수록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점점 더 그까짓 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퍼 좀 내려주실래요?

내 기억 속에 가끔씩 뜬금없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해 초겨울 날이었습니다. 마트에 차를 주차한 뒤 아들과 아내는 장을 보러 가고 저는 길 건너편에 있는 휴대폰 A/S센터를 들러 휴대폰을 맡기고 다시 마트로 가기 위해 교차로 신호등에 서 있었습니다. 맞은편에서는 아주머니 두 분이 무슨 냄비를 들고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와서 저는 후드 패딩의 목 부분을 감싸 쥐었습니다. 당시 제 후드 패딩은 집업 후드 패딩이었는데 후드 끝까지 지퍼가 달려있는 패딩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람이 차가워 지퍼를 후드(모자) 끝까지 올렸습니다. 다시 지퍼를 내리려고 하는데 도무지 지퍼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후드(모자)  끝 부분만 조금 내려가 곁 눈질로 바깥을 조금 볼 수 있었습니다. 교차로 신호등에서 이게 무슨 꼴인지..

신호등이 바뀐 소리는 들었지만 곁 눈 질 만으로 횡단보도를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지퍼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고, 지퍼가 씹혔네.. 가만있어 봐요."

"네.."


아무 생각도 안 들었습니다. 그저 아주머니께서 머리 위 후드 지퍼를 빨리 내려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습니다. 지퍼가 내려가고 아주머니가 보였습니다. 두 분이셨습니다.  한분은 냄비를 들고 한분은 저의 후드 지퍼를 성공적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고선 절 보고 웃으시며 갈 길을 가셨습니다. 다시 신호등은 빨간 불이었고 후드 지퍼를 내린 저는 다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들 웃고 있었지만 저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별일 아니었거든요. 지퍼가 고장 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요.

살면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닥치면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당황하지 않는 연습 중입니다. 별일 아니라는 마음으로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받은 것 같아요.

감정노동이 싫어서, 남들이 하는 말을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별일 아닌 듯 던지는 작은 말들이 대놓고 욕하는 것보다 크게 상처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작은 말들은 우리 일상 속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 숨어서 날카로운 날을 숨겨놓았다가 한 번씩 쿡 쿡 가슴을 찌르고는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대화를 하면서 나도, 상대방도 언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빠! 학교에서 영어노래 배웠는데 들어보실래요?"

"나중에 불러줘.. 근데 너 오늘 숙제했어?"


얼마 전 아들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아들은 아빠에게 영어노래 가사를 다 외워 들려주기 위해 학교가 끝나고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영어노래를 외우기 위해 계속 흥얼거렸던 겁니다.

<항상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아들>

"이야~! 영어 가사를 다 외운 거야? 훌륭한데! 최고야!"


이 말 한마디가 그리 어려웠을까? 뒤늦은 후회로 아들에게 미안함이 앞섰습니다. 아들은 아빠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대화 속 숨어있는 작은 말에 상처를 받은 어린 마음을 어떻게 달래줄지 깊게 고민해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 영어노래 외운 거 한번 들려줄래?"

"아직 완전히는 못 외웠는데 해볼까요?"


그러고선 아들은 웃으며 영어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들려달라는 말이 아직 철들지 못한 아빠의 사과 말인 것을 안 것 같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연습
잠깐만 나 좀 보고 올게..
<괜찮아지는 연습 중 입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내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어떨까? 화가 나는 것은 남들이 알 수 없는 지극히 내 감정만의 어긋난 표현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도 어딘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괜찮아질 수 있는 감정노동의 차단 연습입니다. 괜찮아지는 연습은 별거 아닌 감정노동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뒤돌아보면 모두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글을 쓰는 저는 지금까지도 나를 바라보는 연습 중입니다. 언제나 실전에서 패배하지만 그까짓 거 별거 아니라는 마음으로 연습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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