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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벗 Jan 28. 2019

너와 나의 시간을 담다

결혼 전에는 혼자서 휴가 때마다 DSLR 카메라를 들고 출사를 다녔다. 뭐, 근사하게 출사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저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목적지 없이 휴가 기간 동안 계획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내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담아두고 싶어서? 지나가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좋은 장면과 순간은 꼭 담아두고 싶었다.


그렇게 늘 가지고 다녔던 DSLR 카메라는 결혼 이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줄 곧 옷장 속에 박혀 있었고 시간을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아름다운 순간만을 찾아다니던 나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일에만 매달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전형적인 가장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그토록 담아두고 싶었던 시간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고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와 일상에 지쳐갈 때쯤, 문득 카메라가 생각이 나서 옷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몇 년을 사용하지 않아서 '이게 될까?'라고 생각하며 카메라 이곳저곳을 만지고 있었는데 아내가 물었다. "그게 뭐야?", "응, 아니 그냥.." 그리고 다시 옷장 안에 넣었다.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던 것일까? 그냥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하던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조차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 늦은 나이에 무엇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다음 날 저녁 카메라를 옷장에서 다시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아빠는 시간과 아들을 함께 담아줄게.'라고 이야기했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이유가 생겼다. 무엇이든 이유가 있어야지..

아름다운 순간들을 아들과 함께 사진 속에 담고, 아들이 커가는 모습들을 시간과 함께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아기들 짐이 외출 한번 하면 왜 그렇게 많은 건지, 나들이 한번 가려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나가야 하는데 거기다가 카메라까지 들고나가니 아내는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었다. "짐도 많은데 굳이 가져가야 돼? 휴대폰 카메라 좋잖아!" 그렇다! 요새 휴대폰 카메라 정말 좋다. 그래도 나는 단호했다. "싫어, 가지고 갈 거야!" 휴대폰 카메라가 좋기는 하지만 DSLR만큼 멋이 안 난다고 할까? 양보할 수 없었다.

무작정 아들을 따라다니며 셔터를 눌러댔다. 10장 찍으면 좋은 사진 1장 나온다. 그 1장의 사진을 위해 나의 손가락은 바쁘게 셔터를 눌러대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사진이 도무지 몇 장인지 셀 수도 없다. 얼마 전부터는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서 남기고 나머지는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들을 사진첩이나 컴퓨터에만 저장해놓고 보고 싶을 때만 꺼내서 보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예쁜 꽃도 바라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더 이상 예쁜 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향기를 머금고 있는 꽃이라도 그 향을 느껴주지 않으면 좋은 향기인지 모른다. 수많은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정원도 가꾸지 않으면 단지 지저분한 정원에 불과한 것이다. 예쁜 사진도 가치의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여러 사람들이 보고 느껴야 사진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아들의 성인식 계획을 세웠다. 10년 후의 일이다. 10년의 계획이다. 용돈을 열심히 모아서 아들의 성인식 때 인사동 카페를 빌려 성장 사진전을 해줄 생각이다. 어찌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 직업이 포토그래퍼도 아니고 사진이 좋아서 찍는 사람이 사진전이라니 비웃어도 해보려 한다. 물론 사진전의 손님은 아들의 친구들과 가족들이다. 바람이지만 아들의 여자 친구가 그 날 있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사진전이 될 것임을 기대해본다. 아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길 기대해본다. 10년 후에..

"그런데 장소가 왜 인사동이야?"라고 아내가 물어보았다. "몰라. 그냥.." 정말 몰라서 한 대답이다. 나도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는지, 인사동이 떠 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인사동이라고 한 것이다. 무슨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이유는 동기부여 차원에서 있는 것이고..

너무 제멋대로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유도 나에게 필요하면 있어야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냥 되는대로 편하게 살고 싶다. 원래가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던 나였고 일이 생기면 일일이 시시비비를 가려가면서 살아온 것 같아서 내 마음속에 고민과 생각 대신 빈 공간을 넉넉히 만들어 두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출근 준비를 하면서 거울을 보면 어제와 또 다른 낯선 사람이 거울 앞에 서있다. 거울 앞에서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매번 생각해보지만 나의 어릴 적 얼굴이 생각이 안 난다. 어떻게 생겼었지? 이 얼굴이 아닌데.. 주름개선제도 발라보고 좋다는 스킨, 로션 듬뿍 발라보아도 내 얼굴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뭐해? 출근 안 해?"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매번 나를 머리 아프게 한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만큼 무엇을 더 얻었을까?' 그리고 또 후회해본다. 왜, 그동안 사진에 나의 모습은 담지 못했는지.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마음의 여유가 더 필요하다.  항상 고민하고 생각 많았던 내게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저자 하완)라는 에세이는 나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었다. 특히, 이 에세이의 메시지 중에 '방전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하는 게 아니라 '덜'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좀 덜 하고, 노력도 좀 덜 하고, 후회도 좀 덜 하면 좋겠다.'라는 글은 나에게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용기를 준 것 같다.


카메라 속에 시간과 순간을 담아왔던 것처럼 어른들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공간 넉넉한 SD카드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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