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타계한 김용(金庸)은 살아생전 15편의 무협소설을 남겼다. 김용은 위대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언론인이었으며, 정치인이었다.
무협종사 김용의 첫 소설작품은 1955년에 쓴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젠 부도로 없어진 출판사인) 고려원에서 [소설 청향비]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었다. [서검은구록]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는 홍콩-중국에서 몇 차례 만들어졌다. 영화로는 쇼 브러더스에서 초원 감독에 의해 1981년도에 영화화되었다. 그 후 허안화 감독에 의해 [서검은구록]과 [향향공주]라는 연작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선 이 두 편이 [진가락]이란 타이틀로 재편집=압축 비디오 출시되었다.
김용의 원작소설 [서검은구록]은 무척 흥미로운 두 가지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만주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의 최절정 시대를 다스린 건륭 황제의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고 또 하나는 그런 최고최강의 황제에게 어울리는 기막힌 황비 '청향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는 (이른바 입관 후) 열 명의 황제가 278년 간 지속된 중국제국 마지막 왕조인데 그중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세 황제의 시대가 최고의 국운 융성기에 해당한다. 이 세 황제의 파란만장한 제국이야기는 최근 중국에서 이월화라는 필명의 작가가 굉장히 긴 대하소설로 만들어내었다. 어쨌든 이중 건륭제의 출생의 비밀이라니? 아시다시피 중국의 전통적 왕위 계승은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광란의 기록이다. 장자(큰아들) 상속이 아니고 황제의 어명으로 낙점된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구조였으니 야심에 가득 찬 비빈이나 아들들이 군사력과 환관들과 결탁하여 골육상쟁의 비극사를 만드는 것이다. 무려 61년간 황제 자리를 지킨 '명도 길었던' 강희제는 네 번째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 사람이 바로 옹정제이다. 옹정제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살벌한 역사를 잘 알기에 새로운 계승법을 만들어낸다. 살아생전 '누구'라고 적시하는 말을 남기지 않고 종이에 후계자가 될 아들 이름을 써둔다. 그리곤 그걸 자금성 건청궁의 '정대광명' 액자 뒤에 숨겨둔다 황제가 죽으면 문무대관들과 수많은 황태자들이 모여 그 종이를 꺼내들고 "the winner is gone........"이 되는 셈이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었던 윤진(胤禛)은 아들이 있었지만 별로 시원찮았다. 그런데 옹정제의 와이프가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 시간에 묘하게도 문연각 대학사로 있던 한족 출신의 진세관(陳世倌)이라는 신하도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윤진 왕자는 진세관의 아들을 궁으로 들이고 딸을 줘버린다. 신생아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놈이 나중에 건륭제가 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국가이고 이 당시 나온 영화나 소설, 역사적인 개념은 모두 한족이 '반청복명'(청나라를 멸하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다. 건륭제의 친부 진세관은 한족이다. 그럼 청나라 최고의 명군 건륭제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수립한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는 진세관의 고향마을인 절강성 해령 지방에서 전설같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작가 김용의 고향도 이 동네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이 이야기에 익숙해 있고 자신의 소설에서 이 설정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럼 결론부터! 과연 신생아 바꿔치기가 있었고 건륭제는 한족인가? 이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이미 "아니올시다!"라고 결정한 상태이다. 여기에 대한 질문을 줄곧 받아온 김용도 시간 날 때마다 "소설일 뿐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남의 역사를 너무 쳐다보지 마시길.
[서검은구록]의 두 번 째 흥밋거리! '청향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향비는 청나라의 향비. 즉 향기로운 왕비라는 소리이다. 사람이 얼마나 향기로우면 냄새가 났을까. 청향비는 '향향공주'라고도 한다. 이 여자에 얽힌 전설도 꽤 많다. 청나라가 위구르 회족들을 물리치고 그 지휘자의 아내를 포로로 잡아 북경에 데려온다. 건륭 황제는 이 여자에 반한다. 고향(사막)을 잊지 못하는 이 여자를 위해 사막과 이슬람식 건축물도 지어준다. 어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이 여자는 죽을 때까지 고향을 잊지 못 했다고 한다. 참, 이 역사적으로 이 여자는 건륭보다 23살이 어렸다고 한다. 여자는 건륭 황제가 없을 때 황태후(건륭의 어머니)가 이 여자에게 사약을 먹인다. (이것도 거짓말이란다. 역사적으로 향비로 알려진 '용비(容妃)'는 황태후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니 말이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건륭 황제는 향비의 시신을 고이 모셔 고향마을에 안장시키도록 한다. 관에 넣고 66,666명(무려 6만 6천 6백 6십 6명)으로 하여금 향비의 관을 모시게 했다.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땅에 내려놓지 못하게 했단다. 갖은 고생 끝에 고향마을에 도착했을 땐 겨우 '6명' 만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거짓말이다!) 중국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카스(喀什)에는 청향비가 묻혀 있다는 이슬람식 사원이 있다. 놀랍게도 북경 황제들의 능이 모여 있는 청 동릉(淸東陵)에도 청향비의 묘가 있다. 어느게 진짜 청향비의 묘인지는 '강희제가 한족인가'만큼이나 호사거리이다.
어쨌든 최근 역사적 발굴 이야기를 하면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1979년 말경에 청동릉의 발굴했는데 놀라운 부장품이 나왔다. 무덤 속 웬만한 부장품은 다 사라졌고 머리카락(변발)와 옷 등이 남아있었다. 물론 건륭 황제를 사로잡은 향기로움은 남아있지 않았다. 유골을 감식한 결과 이 여자는 50세 전후에 죽었다고 한다. 혈액형은 'O'형이다. 향향공주가 O형이란 말이다. (건륭제가 한족인가 궁금하다면 DNA조사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서검은구록]의 시대적 배경인 건륭황제 시대의 두 가지 미스터리는 저렇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진가락은 멸청흥한(滅淸興漢)의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 홍화회(興華會)를 이끌 새 총타주(대장)가 된다. 젊은 진가락이 갑자기 총타주가 된 것은 전임 총타주인 우만정(于萬亭)이 어느 날 밤 자금성으로 건륭 황제를 만나고 돌아오다 갑자기 병사하였기 때문이다. 청을 멸하다고 나선 흥화회 최고 우두머리가 왜 한밤중에 몰래 건륭을 만났을까.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제쳐놓더라도 말이다) 우만정이 건륭을 만났을 때 배석한 홍화회 4번째 인물 문태래가 그 비밀을 알 것 같지만 건륭은 문태래를 잡아두고 뭔가 입막음을 하려고 애쓴다. 알고 보니 건륭은 어릴 때 태어나자마자 진세관의 집에서 청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진가락은 진세관의 또 다른 아들이다. 즉 건륭과 진가락은 형제인 것이다. 한 사람은 청의 황제, 한 사람은 그를 죽이려는 홍화회의 총타주이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설정인가. 소설에서는 이것과 함께 향향공주를 주요인물로 삼는다. 위구르 지역 회족 공주였던 향향공주는 워낙 아름다운 청순녀라서 건륭 황제와 진가락 두 사람이 모두 첫 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향향공주의 언니인 곽청동의 이야기도 아주 매력적인데.. 그것까지 할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이제 충분히 김용 소설과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럼 81년 쇼브라더스 초원 감독의 [서검은구록]은 어떨까. 영화는 1시간 42분짜리 영화이다. 원작 소설이 4권이니 '사조삼부작' 같은 대하소설에 비해선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이들 내용을 100분 짜리에 압축시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쇼 브라더스는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다. 향향공주 이야기를 모두 들어낸다. 즉, 광활한 사막과 수많은 낙타, 그리고 소설을 읽자면 [반지의 제왕]의 명장면 저리 가라 할 만큼 판타스틱한 늑대 출몰 장면과 비밀의 궁전 같은 결정적 장면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자연히 여자 하나를 두고 진가락과 건륭이 얼굴 붉히는 일 따위는 등장할 틈도 없다.
소설에서 건륭황제는 뛰어난 명군의 면모라기보다는 만주족이 세운 나쁜 청나라의 나쁜 황제 정도로 그려진다. 영화에서도 진가락은 잘생긴 적룡([영웅본색]에서의 대머리가 아니라 쇼브라더스의 간판스타 시절의 적룡임!)이 팬들의 시선을 끈다. 원작 소설에서는 건륭 황제의 오른팔 무사로는 장소중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그의 무공은 아주 막강하여 진가락도 쩔쩔 맬 정도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진가락(적룡)이 최고의 무공을 가진 주인공을 나온다. 소설에서는 14명의 협객(나중엔 진가락을 시중들던 심연이 포함되어 15당가가 된다!)들이 골고루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4거, 7거, 13제..." 등등 이름만 부르는데도 한참 걸린다. 생각해 보라. 지금 문태래가 아문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총타주 진가락이 지시를 내린다. (중국에서는 첫째 형은 一哥, 둘째를 二哥식으로 부른다. 哥는 '꺼'로 발음한다)
[영웅본색]에서 장국영의 형으로 나왔던 적룡이 한창 '꽃미남 외모'를 자랑하던 젊은 시절에 출연한 영화이다. 그 외 쇼브라더스의 알만한 인물로는 우선 나열과 곡봉 등이 있다. 요즘 홍콩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칙사가 홍화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출연한다.
소설부터 읽고 영화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갈 내용이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보다 위에 말한 건륭제 출생비밀이나 향향공주에 얽힌 뒷이야기가 내겐 더 흥미롭다.
참. 소설에서는 탑 안에서 싸우는 장면이 꽤나 치열하고, 거창하고, 중요하다. 영화에서 폼은 냈다. 그런데 마지막 탈출 장면은 정말 '판타스틱'하다. 소설에는 없는 '창의적'인 방법이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