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의 무협엔 정이 흐른다
지금은 중국(대륙)에서도 영화든, TV드라마든 무협물이 넘쳐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오랫동안 쿵푸, 무협물은 홍콩영화계의 특산물이었다. 홍콩의 걸출한 작가 김용과 고룡 등 무협작가들이 내놓은 수많은 작품들이 쇼브러더스와 이후 홍콩영화사들이 앞 다투어, 거듭하여 무협영화를 찍어내다시피 했었다. 그런 무협물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왕도려(王度廬,왕두루)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와호장룡’의 원작자이다. 중국출신이고, 오랫동안 죽의 장막에 둘러싸여있다 보니 그의 작품은 뒤늦게 ‘다시’ 알려지게 된 셈이다.
왕도려는 이른바 ‘5대 북파(北派)무협소설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38년부터 다섯 편의 연작을 내놓았다. 경학곤륜(鹤惊昆仑)-보검금채(宝剑金钗)-검기주광(剑气珠光)-와호장룡(卧虎藏龙) -철기은병(铁骑银瓶)이다. 마치 죠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처럼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가는 장대한 사가(SAGA) 드라마이다. 이안 감독은 이중 <와호장룡>을 영화로 옮겼다.
<와호장룡>은 대만을 떠나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은 코스모폴리탄 이안 감독의 2000년 작품이다. 홍콩액션영화의 산증인인 원화평이 무술감독을 맡은 이 작품은 스토리나 촬영, 정서까지 완벽하게 아시아적 무협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물론, 똑같은 이유로 ‘아이사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서구관객을 위한 쇼’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와호장룡>의 이야기는 이렇다. 협객 이모백(李慕白)이 강호를 떠나며 홍안지기인 유수련(俞秀莲)에게 천하보검인 청명검(青冥剑)을 철패륵(鐵贝勒爷)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구문제독의 딸 옥교룡(玉娇龙)이 한밤에 이 보검을 훔쳐가고, 그 행방을 좇던 중 제독의 저택에 벽안호리(碧眼狐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옥교룡은 벽안호리에게서 무술을 배웠고, 북경으로 오기 전 나소호(罗小虎)와 정을 나눈 사이. 부모의 강권으로 원치 않은 혼인을 올려야하는 옥교룡은 자유를 찾아 강호를 돌아다니고, 이모백은 따끔한 충고의 말을 하지만 이미 벽안호리의 독침에 쓰러진다. 옥교룡은 규수의 예의범절, 사사로운 인연을 끊고, 무당산 절벽에서 구름 속으로 뛰어내린다.
왕도려의 다섯 작품을 줄여서 ‘철-기오부작’이라고 한다. 다섯 편 모두 강호의 다툼을 다루며,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를 읊는다.
첫 번째 작품 <경학곤륜>은 강소학과 포아만의 이야기이다. 강소학의 아버지 강지승은 곤륜파 우두머리인 포진악의 제자이다. 뭇 제자 중 최고의 무예를 가졌지만 계율을 어기고 포진악의 사주로 죽음을 당한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어린 소학은 곤륜파 제자들의 무시와 멸시를 당하며 지내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되고는 강호를 떠돌며 무술을 익히고 복수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아만과 이룰 수 없는 연정을 품게 된다. 아만은 포진악의 손녀였던 것이다.
<보검금채>에서는 유수련과 이모백의 이야기이다. 표사의 딸 유수련은 맹사소와 이미 혼약이 된 상태. 맹사소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니는 신세이다. 이모백은 유수련을 위해 맹사소를 찾아 사방을 떠돌다가 경성에서 이름을 바꾼 그를 만나 결맹한다. 강호의 싸움에서 맹사소는 이모백을 구하다 절명한다. 이모백은 그제서야 그가 맹사소였음을 알게 된다. 감옥에 갇힌 이모백을 강소학이 구해준다. 강소학은 이모백의 부친 이광걸과 친분이 있었다.
<검기주광>에서는 강호에서 무용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이모백과 유수련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모백은 강호에서 청명도와 혈도도 등을 얻게 된다.
5부작 중 네 번째 이야기 <와호장룡>이 바로 이안 감독이 영화로 옮긴 부분이다. 강호를 떠나려는 이모백이 청명도를 친분이 있는 철패륵에게 선사하고 그 보검을 옥교룡이 훔쳐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모백과 유수련은 서로에게 정을 느끼지만 맹사소가 남긴 인습의 강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맹랑한 옥교룡은 산도적과 연분을 나누고 가문도 기꺼이 차버리는 신여성의 이미지를 남긴다. 영화에서 옥교룡은 무당산 도량에 은거한 나소호를 찾아가서는 구름 자욱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다. 소설에서는 옥교룡이 파혼하고, 옥씨 가문과 절연하는 장면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철기은병>은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다. 눈이 쏟아지던 날 한 주막에서 옥교룡이 혼자서 아이를 낳는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옆방에 머물던 방씨 부인이 자신이 막 낳은 딸과 바꿔치기를 한다. 어미는 못내 미안한지 여자아이 옆에 은병을 하나 놓아둔다. 옥교룡은 이 여자에게 춘설병이라고 이름 붙이고 강호의 여자 호랑이로 키운다. 훔쳐간 남자아이의 운명은 기구하다. 산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기련산 한문패의 아들 ‘한철방’으로 성장한다. 이후 아들은 찾는 옥교룡, 친엄마를 찾아 나선 한철방, 그리고 춘설병의 이야기가 눈물과 한탄, 안타까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왕도려의 소설 중 <와호장룡>과 <철기은병>은 오래전 우리나라에 <청강만리>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정말이지 손에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흡입력을 가졌다. ‘하늘을 날고, 시간을 거스르는’ 판타지 무협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운명과 인연이 수놓는 대서사시이다. 이안 감독은 왕도려의 소설에서 그러한 인과 연의 기구함을 적절히 뽑아낸 것이다. 대나무 숲에서의 활공액션의 유려함 보다는 그런 인간의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반부 동굴 씬은 왕도려의 정서에서, 이안 감독의 미학에서 멀찍이 떨어진 홍콩 쿵후물로 전락한 장면이라 아쉽다.
<와호장룡> 개봉 이후부터 이안 감독과 제작자 제임스 샤머스는 속편 제작에 뜻을 두었지만 결코 이루지 못했다. 대신 2016년 원화평이 감독을 맞은 <와호장룡2>가 만들어지긴 했다. 넷플릭스에 <와호장룡-운명의 검>으로 공개되었는데 너무나 허망한, 졸작이었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