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금 비, 바람
San Miguel de Merueldo-Santander 18.25km
걷기 시작하려는데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들 학교 문제로 우리가 계획했던 일이 꼬이고 만 것이다.
까미노 마치고 돌아가면 가족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그런 일정을 만들기는 불가능해졌다.
마음이 아쉽고 허탈해서 까미노고 뭐고 아무런 의욕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침 식사 마치고 모두 다 떠난 텅 빈 알베르게에 멍하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파비안을 따라서 걸었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거세서 쉽지 않은 날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깐따브리아 바닷가에 거센 바람이 몰아치니 이제는 무서운 바다로 변해버렸다.
오늘도 배를 타는 여정이 끼어있다.
Somo에서 배를 타고 산탄데르로 건너왔다.
산탄데르는 스페인 북부에서 빌바오와 견줄만한 대도시이다.
선착장에 내리자 바로 도시 중심가 한가운데로 들어서게 되는데, 폭풍의 언덕 같은 바람을 맞으며 바닷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많은 인파와 신호등, 건널목을 만나니 도시를 처음 보는 촌사람처럼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번 까미노 여정이 이곳 산탄데르까지였던 파비안과 헤어졌다.
이탈리아 로마에 사는 파비안은 산탄데르 공항으로 가서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는 어제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려 했으나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고 또 가는 길도 헷갈려서 그냥 택시를 탔다.
영어가 약한 하지만 천사처럼 친절한 아줌마 택시 기사였는데 에어비앤비 주소를 보여주며 가자고 하니 내 말은 안 듣고 내 배낭의 가리비를 가리키며 미소 짓는다.
그래요, 나는 순례자예요.
나도 미소로 답했다.
내가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는 큰 규모의 아파트 단지여서 내가 가야 하는 동을 찾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아줌마 택시 기사는 일방통행인 아파트 주변 도로를 두 번씩, 세 번씩 돌면서 기어코 내 숙소를 찾아 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한 번이라도 이런 친절을 베푼 기억이 없어서 면구스러웠다.
방값이 10유로인데(세상에!) 집이 깨끗해서 마음에 든다.
고등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싱글맘 집인데 큰 방과 화장실을 따로 내주었다.
부엌도 적당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젊은 싱글맘이 집에서 담배를 피워서 좀 거시기했다.
어쨌든 오늘의 목표인 시장 봐다가 밥 해 먹을 생각으로 마음이 들떴다.
아파트 바로 옆에는 큰 백화점이 있었는데 백화점 내 식품 코너에서 이베리코 삼겹살과 양파, 상추, 와인, 에스뜨레야 담 맥주를 사다가 거한 디너를 시도했으나 기대한 것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역시 밥은 함께 먹어야 맛이 생기는 것 같다.
아까운 고추장을 다 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