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스페인 청년들과의 대화

6.5 수 흐리고 비

by 이프로

Grado-Salas 22km


7:00 출발, 12:00 도착.

한시에 깨서 다시 잠들어보려 했지만...대신 한국 사무실과 카톡으로 중요한 업무 처리를 하고 떠나 있었던 동안의 사정도 파악했다.

잠을 못 잤으니 잘 못 걸어야 했지만 궂은 날씨에도 무난히 즐겁게 잘 걸었다.


나 없는 동안 아이들 챙기느라 몸도 마음도 바쁜 아내와 통화를 했다.

내가 감당했어야 하는 이런저런 일들을 척척 해내는 아내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많은 이들이 내가 산티아고를 여러 차례 아내 없이 혼자 다녀온 것을 두고 다양한 코멘트를 한다.

그런 장기 외유 허락을 얻어낸 것을 보니 폭군이거나 평소에 비위를 맞추어 아니냐, 집안과 직장을 그렇게 오랫동안 비워도 문제가 없다니 희한하다 등등.

, 자기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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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도중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이제는 얼굴도 익고 대화도 몇 차례 나눈 요르그를 비롯한 동행들과 바르에서 간식을 먹으며 한참을 쉬었다. 30 후반쯤인 요르그와 아프가니스탄 출신 독일 거주 이발사 청년, 바르셀로나 출신 나이스 가이 대니얼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년을 넘긴 노인 남자가 길의 주요 순례자이다.


살라스의 알베르게는 고풍스러운 성벽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운치 있었다.

후다닥 샤워하고 어제 사 둔 음식들로 점심을 때우고 빨래도 해서 건조기에 말렸다.

계속 비가 오길래 더 가지 않고 이쯤에서 멈춘 것이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해가 쨍한다.

날씨가 왔다 갔다 한다.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산악 지형이라 날씨는 오락가락을 반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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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서 다분히 한국인으로 보이는 60대 중후반쯤의 노인을 봤는데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몇 번 마주치다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버려 그냥 목례만 하고 말았는데 상대도 낯을 몹시 가리는 듯하다.

한국인인 줄 알았다가 판단을 유보하게 된 것은 그가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보고 온 물건을 주방에서 꺼내는 것을 보았는데 한국인이라면 고르지 않을 물건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위스키 750미리 큰 병 하나와 1.5리터는 되어 보이는 콜라 페트병.

그는 주방에서 글라스를 하나 가져오더니 위스키와 콜라를 익숙하게 섞더니 같이 사온 견과류를 곁들여 유유히 마시는 것이었다.

순례길에 위스키와 콜라 대병이라니.

저걸 한 번에 다 마실 수는 없을 텐데 그럼 한동안 들고 다닌다?

너무 오지랖 넓게 다른 순례자를 꼬치꼬치 감시하는 것 같아 주방을 빠져나왔다.


점심 먹고 나오는 요르그와 대니얼을 만나 중세 타운 살라스의 고성과 교회를 구경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저녁은 근처의 로컬 식당에서 아주 푸짐하고 맛있는 순례자 메누를 먹었다.

식사 후 대니얼은 그가 묵고 있는 근처의 공립 알베르게로 가고 요르그와 나는 또 바르에 가서 와인을 한잔 더했다.

사실 나는 그쯤에서 쉬고 싶었는데 요르그가 청했다.

비 오는 밤의 바르에는 우리가 거의 마지막 손님인 줄 알았는데 바르 뒤채 화장실 가는 길목에 스페인 십 대 혹은 청년들이 대여섯 명 모여서 떠들썩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불량기도 있어 보이고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공격성도 보여서 나는 자리를 뜨고 싶었는데 의외로 요르그가 그들에게 친화적으로 다가갔다.

영어가 서툰 스페인 청년들은 요르그가 스위스에서 온 것을 알고 반색을 했다.

이들도 스위스가 얼마나 부자 나라인 줄 알고 있었는데 직접 요르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는 즉석 스위스 생활 Q&A가 열린 것이다. 요르그는 싫증도 내지 않으며 스위스의 최저임금과 스페인 청년들이 스위스에 가서 얻을 수 있는 일자리와 대강의 예상 수입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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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그는 아무런 음식도 시키지 않은 채 담배와 술만 마시고 있는 그들에게 음식을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스페인 청년들은 사양했다.

대신 그들은 요르그에게 갖고 있던 대마초를 주었는데 요르그가 돈을 지불하려 하자 스페인 청년들은 괜찮다고 자기들은 또 많이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요르그는 한대 피워 물더니 품질이 좋다며 나에게 권한다. 노 쌩큐.

불량스럽게 그들을 바라본 것은 한국에서 온 꼰대의 시각인 듯했다.

여기 애들은 대마초를 피워도 참 착하고 매너 있게 피운다.

내가 신기해했더니 요르그가 대마초 피우는 사람은 다 착하다고…글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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