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목 맑음 Lugo 휴식일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새벽 1시경 깼는데 계속 자다가 졸다가 했다.
6시경 일어나 5층 주방에 올라가 아침을 해 먹었다.
주방이 깨끗하고 그릇과 주방 기구들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어제저녁 때 아침을 해 먹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미리 식사 거리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그래 봐야 계란 프라이와 소시지를 익혀서 바게트 빵과 함께 먹는 것이지만 그동안 갖고 다니던 카누 커피를 타 먹는 것도 오랜만의 색다른 맛이었다.
대부분 일행들은 오늘 하루 더 머물며 휴식을 취하지만 온 발바닥이 물집 투성이로 속도가 느리고 자주 쉬는 루마니아인 보그단은 쉬지 않고 오늘 길을 떠난다며 아침에 올라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그가 느리게 가기 때문에 산티아고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천천히 시내 구경을 했다.
그 유명한 로마 성벽 위에 올라가 구도심을 한 바퀴 돌며 성벽 아래 도시를 구경했다.
성벽 위에 길이 나있어서 심지어 차도 다닐 정도였는데 일반 차량은 아니고 성벽을 관리하는 공무 차량으로 보였다.
우리나라의 수원 화성이나 중국 만리장성 느낌이었는데 다만 구 도심을 삥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 3층 높이쯤의 위치에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니 가정집들도 내려다 보이고 초등학교 체육 시간의 운동장도 보여서 스페인 중세 도시의 평온한 아침 일상을 온전히 훔쳐볼 수 있었다.
벼르고 벼르던 머리를 잘랐다.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머리를 자르고 비행기를 탔는데 어느덧 한 달 보름 가까이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치렁치렁 해진 데다 순례길을 걸으며 햇빛을 막느라 계속 모자를 쓰고 다니니 긴 머리가 눌려서 매일 오후면 몰골이 아주 이상해진 것이다.
미용실이 두 군데 있었는데 도심 중앙에 있는 미용실이 아침부터 영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번역기를 이용해서 서툰 주문을 하려고 했는데 미용실 여자는 내가 이런저런 주문을 할 겨를도 없이 전기 바리깡으로 머리를 뭉텅이로 잘라버려 나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잘라내서 나는 거의 군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투덜거리기라도 했겠지만 허탈하게 웃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다.
카페와 바르가 즐비한 골목길 어귀에서 맛난 커피를 마시고 돌아와 내 침상에 드러누워 과일을 먹으며 한국 프로 야구를 봤다.
2시에 요아킴을 만나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요아킴이 독일어 가이드 북과 독일인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모아 결정한 집이라는데 그는 맛집이 분명하고 관광객 상대의 그저 그런 집은 절대 아니라고 단언했다.
과연, 아주 맛있는 뿔뽀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가고 싶은 식당이 있었는데 식당이 즐비한 거리에 미슐랭 별을 하나 받은 해산물 식당이었다.
요아킴이 너무 강력하게 뿔뽀 집을 주장해서 따라가서 맛나게 먹기는 했지만 미슐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온 리타 말을 들어보니 너무 훌륭하고 값도 합리적인 집이었다.
저녁이라도 그 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저녁은 점심과 달리 예약 손님만 받고 있고 오늘, 내일은 이미 예약이 다 찼다고 한다.
아쉽다.
저녁에 먹을 과일을 사러 나간 길에 300유로를 인출했다.
요아킴이 사 온 치즈와 내가 사 온 과일과 맥주로 리타와 함께 저녁을 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