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9. 멜리데 뿔뽀

6.15 토 흐리다 개다가

by 이프로

Ferreira-Melide 22km


와인을 마시고 일찍 잠이 들었다가 몇 번을 깨고 자고를 반복했다.

다행히 투숙객이 우리 방으로 오지 않아서 내 침대 위 이층에는 아무도 자지 않았다.

6:00 경 일어나 요아킴과 함께 주방으로 내려가 호스피탈레로가 챙겨주는 알베르게 조식을 먹고 7:40 출발했다.

IMG_7054.JPG


IMG_7058.JPG


오늘 걸은 거리가 22킬로인데 중간에 바르가 없어서 11시까지 내리 걸었다.

멜리데에 도착한 시간은 1:00.

이제는 그동안 내가 걸은 프리미티보 길이 프랑스 길과 합쳐졌는데, 과연 엄청나게 불어난 숫자의 순례자들이 곳곳에 무리 지어 다니고 있었다.

프랑스 길의 순례자들 중에는 정말로 한국인들이 많았는데 한국인 순례자뿐만 아니라 백인 순례자들도 많았고 전반적으로 왁자지껄한 느낌이었다.

그들도 여기까지 700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은 사이라 서로가 익숙해졌을 것이다.


수원의 한 성당에서 사진을 찍는 동호회 모임이라며 십여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목에 카메라를 메고 걷고 있었고 그 외에 뿔뿔이 삼삼오오 걷고 있는 한국인 순례자들이 보였다.

이쯤 걸어오면 대체로 4주 이상 걸은 것이기 때문에 모두들 까미노에 적응이 되어 있었고 특히 한국인들은 서로 연령대나 보행 속도,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그룹이 지어 있었다.

재밌는 것은 외국인 순례객들에게는 '올라'니 '하이'니 하며 인사를 아끼지 않는데 서로가 한국인임을 일찌감치 알아본 우리끼리는 정작 못 본 척 모르는 척 외면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예외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스스로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우리가 같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무례하거나 외국인에게만 인사성이 밝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쑥스러움'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한국말로 인사하면 답례로 인사를 건네야 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기에는 아쉬운 듯 하니 뭐라고 덧붙여서 인사를 이어야 할 텐데 그런저런 말 섞음이 불편하고 신경 쓰이니,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외국인에게는 간단하게 '올라'한마디로 '나 너에게 쌩까지 않는다' 표시를 했으니 이후로 신경 쓸 일이 없어 편리한 것이 아닐까.


오늘의 알베르게는 사립이었고 나름 평이 좋은 곳이었는데 오늘도 역시 내 이름으로 두 명을 예약했더니 또 나보고 2층을 쓰라고 한다.

알베르게 같은 방에 한국인 부부가 자리를 받아 들어왔는데 북쪽 길을 걸어왔다니까 놀라는 리액션이 과하다.

부부 중 여자는 지쳐서 샤워 누웠는데 남자가 지난 며칠간 함께 걸었던 젊은이들, 한국 아가씨들이 어제 늦은 밤까지 술 취해 떠들어서 자기가 나서서 한마디 했더니 대응이 불손했다고 꽤나 기분이 상했다는 얘기를 한다.

요즘 젊은 애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던데 내가 보기엔 남편도 아직 젊은 축에 끼일 듯하다.


6년 전에 프랑스 길을 걸을 때는 지나쳐 버렸던 그 유명하다는 멜리데 뿔뽀 집에스겔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과연 훌륭하다. 프랑스 길에서 맛보았던 이 뿔뽀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몇몇 스페인 요릿집에 찾아가 주문해 봤으나 감흥이 달랐다. 결국 마트에서 문어를 사고 파프리카 가루를 택배 주문해가면서 직접 만들어도 봤으나 실패했었다.

요아킴도 독일에서 뿔뽀 생각이 간절했었다며 양이 제법 많은 뿔뽀를 각 1 접시씩 시켜서 둘이 포식했다.

fullsizeoutput_b41f.jpeg


IMG_7077.JPG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요아킴이 웬일로 와인을 한병 더 사더니 주방에 눌러앉아 늦게까지 와인을 마셨다. 이 독일 노친네가 맥주와 와인 한잔씩을 반주로 즐기는 모습은 여러 차례 봤지만 이렇게 취하도록 마시는 모습은 처음 봤다. 산티아고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흥분은 얌전한 독일 노친네도 이렇듯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잠들었는데도 밤새 코 고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금방 깼다.




keyword
이전 09화38. 에고,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