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왜 내 영화는 자꾸 망하는 걸까?

by 이프로

먼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영화학과가 있는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때는 영화학과 학생이었고 지금은 영화학과 교수인 나의 대답은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이다.

먼저 ‘그렇지 않다’부터 이유를 대 보자면 영화학과를 졸업하지 않고도 멋진 감독이나 영화인이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계인이 톱클래스 영화감독으로 인정한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은 영화학과 출신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나라에서 영화인 양성을 위해 세운 단기 영화 교육기관인 영화아카데미 과정을 마치기라도 했지만 박찬욱 감독은 제도권 내 영화 교육을 받지 않았다. 역시 뛰어난 감독인 류승완 감독은 심지어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고졸 감독임에도 화려한 영상 감각과 연출력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다. 연세가 지긋해서 당시에는 영화대학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임권택 감독 역시 고졸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 등 해외의 뛰어난 감독 중에도 상당수는 영화학과 출신이 아니거나 대학 졸업자가 아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렇다’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자. 영화학과 출신으로 성공한 감독이 부지기수다. 강제규 감독이나 정윤철 감독은 영화학과 출신 감독으로 흥행작과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프랜시스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 미국의 유명 감독들 역시 영화학과 출신이다.


다시 말해 영화감독이 되는 데에 영화학과 진학은 필수는 아니지만 다닐만한 이유는 있다.

영화학과 출신이 아닌 성공한 영화인들은 나름대로의 영화 수업을 개인적으로 또는 도제식으로 익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개인 학습을 한 것일까?

그들 모두를 만나서 물어본 일은 없으나 이들이 공통적으로 학습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정리해 보면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다르게 바라보는 관찰력, 그리고 인문학적, 미학적 학습과 사고이다.


영화감독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마이크를 손에 쥔 자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어야 한다.

감독은 ‘할 말이 있는 자’ 여야 잘할 수 있다.

할 말이 많은 자는 많은 영화를 지어낼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영화감독은 되고 싶은데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이 있긴 한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청춘들을 자주 대한다.


우선 할 말이 없다면 당분간 영화는 접자.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세상은 어떤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지

어떤 메시지를 기다리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관찰’은 직접 거리에 서서 행인들을 지켜보는 방식으로도 가능하고 독서와 신문을 보는 것으로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이 내 관객이고 그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러 와야 내 영화는 흥한다.

나는 내 관객이 감동받았던 스토리와 즐겨 듣는 음악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뉴스,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막막하다면

스스로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시시하다고 느껴진다면

이런 세상을 읽는 독서와 관찰을 해 본 적이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왜 자꾸 내 영화가 망하냐면 아무런 인풋 없이 아웃풋을 기대하다 보니 그렇다.

들어간 것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관심 있어하는 일들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지 감이 잡힐 수 있다.

어떤 결과, 무슨 메시지를 세상이 원하는지 짐작이 간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기대가 생길 것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내 맘대로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영화를 하려는 자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는 ‘상식’이다.

인문학이란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세상의 드라마는 문사철 안에 들어있다.

인문학이 어렵거나 친해지기 힘들다면 좀 쉬운 옛날이야기, 신화 등으로 접근해 볼 일이다.


미학은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들에 관한 공부이다.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심도 있는 미술 공부라 생각하고 대표적인 사조와 그들이 아름답다고 판단한 작품과 기준들을

알아보면 좋을 것이다.

덧붙여서 현재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광고와 패션에도 관심을 갖고 특정한 형식과 칼라에 반응하는 대중과 흐름을 공부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ucloudPhoto20130401_190615977.jpg

위에서 말한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찍는 것은

식재료나 주방용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에게 요리를 맡긴 것과 다르지 않다.

성급하게 카메라를 집어 들거나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먼저 ‘교양과목’을 듣자.

역사, 문학, 철학, 언어, 뉴스, 음악, 미술, 광고, 패션…

기본기를 다지자.


여기까지 읽고 난 청춘들은 ‘이 꼰대도 결국 똑같은 소릴 하고 있네, 또 공부하라는 거잖아’ 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기본기는 익히되 내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 키 포인트이다.

세상사에 귀를 기울이되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문사철을 익히되 남들과 다른 관전 포인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똑같은 역사를 읽었지만

그 안에서 드라마를 읽어내는 눈을 키우고

같은 또스또예프스키와 박경리를 읽었지만 기승전결과 소설 속 캐릭터를 분석해 내는

남다름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거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세상을 다르게 읽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남다른 눈이 없다면

사람들과 다른 세상을 읽어내는 능력,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해석해 내는 능력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영화를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 영상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지만

아무나 세상을 감동시킬 영화를 만드는 위대한 감독이 될 수는 없다.

카메라는 준비된 자에게 맡겨져야 한다.


거짓말로 당신을 위로해주고 싶지 않다.

아무나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주목시키는 뛰어난 언변과 놀라운 창의력과 상상력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타고 난 이와 견줄 수 있도록 피나는 노력을 해야 당신의 영화는 성공할 수 있다.

천부적인 이와 겨뤄야 하는 아주 불리한 경쟁 구도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겨낼 수 있는가?


keyword
이전 01화왜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