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나리오

by 이프로

시나리오는 붓 가는 대로 쓴다. 영화에서는 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찍는가가 중요하지, 그건 내 머릿속에 있으니 시나리오보다는 내 머릿속 콘티가 중요한 거다.


시나리오 scenario는 사실 영화 대본이라는 뜻보다는

어떤 사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상적인 결과나 그 구체적인 과정을 뜻하는 데

어쩌다 보니 우리는 시나리오를 영화 대본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영화 대본, 각본이라는 뜻을 정확하게 영어로 표기하자면 film script나 screenplay 가 더 적절한 단어이다.


시나리오는 재밌는 ‘스토리’가 잘 짜인 ‘시나리오 구조’에 담겼을 때 빛을 발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토리는 뭐고 시나리오 구조는 또 뭘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지는 않았나?

개념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스토리는 ‘무엇’에 해당하고 ‘시나리오 구조’는 ‘어떻게’에 해당한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풀어쓰는 것이 시나리오이다.


인생에서 첫 시나리오, 혹은 두 번째 시나리오를 쓴 감독들이 들고 온 시나리오에는 자주 발견되는 문제가 있다.

자기가 쓴 시나리오인데 자기가 만든 스토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영화학과에서 벌어지고 있다.

학생이 써 온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쓴 사람이 내용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하면 학생은 불쾌해한다.

그러면 내가 다시 묻는다.

그래서 이 인물은 몇 살인가요?

키는 얼마나 되고, 부모는 뭐 하는 분이신지, 이 인물의 체격은 어떤가요?

이 인물이 가장 즐기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대답을 잘 못한다.

그걸 순발력이라고 여기는지 즉석에서 어설픈 대답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는데

좀 전에 대답한 내용과 앞뒤가 맞지 않거나

본인도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말하다 말고 중언부언하며 수정한다.


아는 사람의, 아는 얘기를 하라.

내 영화의 주인공인데 그를 잘 모른다면 어떻게 그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영화 속 인물의 직업이나 그가 속한 사회를 잘 모른다면 그의 갈등을 잘 묘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작가는 그를 창조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신이다. 내가 그를 학생으로 만들면 그는 학생이고, 그를 얼치기 래퍼로 만들면 그는 래퍼이다.

나는 학생의 일상에 대해서 꿰고 있어야 하고 래퍼가 되려는 그의 하루가 어떤지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조직폭력배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조폭영화 몇 편 본 것이 다 인 사람이 조폭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음악 영화를 만든다면서 음악 트렌드나 해당 음악 장르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가 나오고 말 것이다.

원래 알고 있던 세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래서 유리하다.

대학생이 대학생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된 어른이 하는 것과 비교할 때 훨씬 유리하다.

조직폭력배 밑에서 잔 심부름이라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조폭 세계의 디테일 묘사에 평균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세상 모든 직업군을 작가나 감독이 다 경험해 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연쇄살인자나 미래세상의 인물은 체험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사, 리서치가 필요하다.

책으로, 인터넷으로, 각종 논문과 보고서, 간행물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그 생활을 한 사람이 영화를 보더라도 그럴듯하군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그 세계를 그린 영화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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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조사에 착수하기 전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는데

누가 ‘이 얘기를 벌써 해버렸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구글링으로, 각종 영화제 사이트를 검색하는 것 등의 방법으로

내 영화 소재와 중첩되는 작품이 있는지 알아본다.

주제가 비슷하더라도 이야기 전개 방식이 다르다면 얼마든지 영화화가 가능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하려는 얘기와 흡사한 영화가 이미 세상에 나와있다면 다르게 만들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스토리를 찾아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인물은 악당이든 영웅이든 관객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메인 인물이 은행강도면 우리는 경찰을 적대시하게 되고

반대로 경찰이 메인 인물이라면 당연히 강도는 우리의 적이 된다.

기억하라, 우리는 지금 단편영화를 만드는 얘기 중이다.

단편 영화가 20분이 넘어가면 긴 편이다.

30분이 넘는다면 꼭,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누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나 단편 영화는 통상 20분 안팎 일 때 단편답다.

단편 영화가 40분이 넘어간다면 둘 중의 하나이다, 볼 가치가 없거나 어마어마한 명작이거나.


그래서 20분짜리 단편을 일반적인 단편영화의 길이라고 가정을 해본다면

영화는 시작한 지 5분 안에 우리의 주인공이 뭘 원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편 영화인데 영화를 본 지 7분이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주인공이 뭘 원하는지 파악이 안 된다면

뭔가 심하게 잘못된 영화이고 그것은 스토리와 시나리오 구조일 확률이 높다.

시간 안배는 중요하다. 다섯 단계로 나누든지, 세 단계로 나누든지는 창작자의 자유이지만

20분 영화의 결말이 마지막 1분에 몰려있거나

발단에서 10분을 사용해 버린다면 관객의 박수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도 이상해진다.


시나리오를 쓴 감독들은 ‘모’ 아니면 ‘도’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아주 만족해하는 부류와 스스로 자기 시나리오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경우다.

삶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정신 건강에 이로울 수 있는데

시나리오를 판단할 때 지나친 자기 확신은 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리뷰, 피드백, 평가를 받아보는 것은 훌륭한 선택이다.

하지만 단순한 영화팬일 뿐인 친한 친구나 늘 나에게 우호적인 가족 중 한 명에게 보여주는 것보다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읽고 분석을 해 본 경험이 있고

영화를 심각하게 비평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시나리오에 대한 단순한 의견을 받기보다는

인물과 대사, 사건과 해결 등의 항목으로 의견을 요청하거나

수정과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받아서

시나리오를 고쳐 쓴 뒤 다시 의견을 들어보면 어수룩했던 시나리오가 점점 틀을 잡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의미 없는 일중 하나가 시나리오는 썼는데 다 쓰고 난 뒤 그냥 두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왜 쓰는가?

간단하다. 영화 찍으려고 쓴다.

시나리오를 썼으면 영화를 찍어야 하고

영화를 찍지 않으려면 시나리오를 쓸 필요가 없다.


영화로 찍을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다.

아, 그냥 이건 연습이야.

그런 건 없다.

시나리오는 문학 작품이 아니다.

정밀한 설계도면이고 설계도면을 각종 건축 기사와 엔지니어들이 검토하고 도면에 맞추어 건물을 지어가듯이

시나리오를 보고 배우와 미술감독과 촬영감독은 연기와 비주얼을 준비한다.


시나리오를 마음 내키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썼다가는 반드시 망한다.

시나리오에는 쓰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찍을지 다 구상했다고 말하는 청춘들을 가끔 본다.

머릿속 구상을 책에 적어야 다른 스태프들이 당신의 촬영을 도울 수 있다.

배우가 어떻게 당신의 머릿속을 헤아리겠는가?


당신의 머릿속 구상을 시나리오에 담아낼 능력이 없다면

열심히 연습하라, 시나리오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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