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형국에도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사진들을 봐서인지 아니면 슬로우비디오처럼 흐르는 시간에 늘어진 일상이 갑갑해서인지 최근 '탈출'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저께는 지인에게 그동안 미뤄두고 있던 가까운 섬 여행을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지인의 부모님 댁이 있습니다. 채비도 없지만 가서 낚시를 하자고 한 겁니다. 여행은 핑계고 실은 탈출하려는 겁니다. 정작 보고싶은 건 밤바다이고 흔들리는 찌입니다. 남을 알기란 참 어렵습니다.
자기자신을 알기도 어려운데 남을 이해하고 안다고하는 건 무모하거나 교만한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물며 한 단어로 다른 사람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그 어려운 걸 해내기도 합니다. 특히 어리면 어릴수록, 세상의 잣대에 길들여지기 전이라면 더욱 더 쉽고 정확하게 그걸 해냅니다. 누구나 별명이 있었을 겁니다. 아주 어릴 때 제 별명은 '돼지'였습니다. 식탐도 많았고 몸집이 비대해서 생긴 겁니다. 그리고 한동안 별명이 없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문박'이란 별명이 생겼습니다. 가당찮게 불법 학위취득을 한 셈입니다. 그럴 때면 가타부타 말없이 받아줍니다.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스스로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에 개의치않을 뿐입니다. 손사래를 치면 겸양 떠는 것 같고 긍정을 하면 양심에 찔립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흠칫 놀라키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속내를 다 드러내는 사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깊은 얘기를 나눌만큼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이 지어준 별명입니다. '한국인 조르바'가 그것입니다. 아직까지 왜냐고 물어 본 적은 없습니다. 짐작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제가 잘 읽지도 그다지 즐기지도 않는 소설 중에서 좋아하는 몇 안되는 소설중 하나입니다. 제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빼다박은 듯한 대목은 몇 번이고 읽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여.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머리로 이해하고 머리로 살아가려는 잘난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입니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디까?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요.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우리는 당신을 제대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책 속에서만 길을 찾고 그 소리에 귀기울여 정작 들어야 하고 느끼고 품어야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경계할 때마다 떠 올리는 말입니다. 바보는 되고싶지 않으니까요.
저는 평소 조르바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면이 많은 것도 같습니다. 인생관이라 해도 좋습니다. 뜬금없는 일도 잘 저지릅니다. 조르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넨 뭐 하는가?> <잠자코 있네.> <그럼 잘 자게.><조르바, 자넨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박경리의 '토지'에도 그런 인물이 나옵니다. 제가 하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서적으로는 더 다가옵니다.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영혼. 거칠것 없이 살아가는 보헤미안 기질의 목수 윤보입니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동학당에 열심이고 항일 투쟁에 뛰어들며 소작농도 아니면서 최참판댁 재산을 가로채는 조준구에 맞섭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데 세상을 달관한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기이 풀잎의 이슬이고 천년만년 살 것같이 기틀을 다지고 집을 짓지마는 많아야 칠십 평생 아니가. 믿을 기이 어디 있노. 늙어서 벵들어 죽는 거사 용상에 앉은 임금이나 막살이하는 내나 매일반이라. 내사 머어를 믿는 사람은 아니다마는 사는 재미는 사람의 맘속에 있다 그 말이지. 두 활개 치고 훨훨 댕기는 기이 나는 젤 좋더마" 비록 활개칠 수 있는 세상은 아닐지언정 어깨 펴고 불어오는 바람을 두팔 가득 안은 채 당당하게 걷고 싶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작중 '나'는 중얼거립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어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은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조르바가 됐든 윤보가 됐든 '나'는 잠든 세상을 깨우지 않고 별을 인채 갯바위에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싶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흔들리는 찌와 몰아일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런 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탈출'은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