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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핀란드 야간열차 체험기

당신이 아직 건강하고 사람과의 거리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by missnow

산타 마을을 관광하고 로바니에미 기차역으로 돌아오니, 저녁 7시 30분이었다.

열차 시간이 9시라 여유는 별로 없었지만, 저녁을 해결할 겸 짧게나마 시내 구경을 할 겸해서 크로키를 하는 손처럼 빠른 걸음으로 로바니에미 시내를 향해 걸었다. 걷는 도중 본 건물 외벽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이 이 겨울 도시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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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한때는 세계 최북단에 위치한, 무려 운이 좋으면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알려진 로바니에미의 맥도널드가 나왔다. 최북단의 위상은 잃었으나 그 명성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지 매장 내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서 밥을 먹었다간 기차를 놓칠 것 같아 맥도널드는 구경만 하고, 근처에 있던 현지 패스트푸드 점에 가서 햄버거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왔을 때 시간이 8시 10분. 햄버거의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햄버거를 씹어 삼키고 나는 기차역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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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도착하니 8시 50분. 열차는 와있었고, 사람들은 이미 다 기차에 탄 건지 플랫폼이 한산했다.

눈이 잔뜩 쌓여 끌리지 않는 캐리어를 줄다리기하듯 끌어당기며 나는 허겁지겁 열차에 올랐다.


야간열차는 20대 때 일본 여행할 때 타 본 적이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이동하기 위해 새벽에 하코다테에서 출발하는 일반석 야간열차를 탔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환승을 해가며 도쿄 우에노까지 갔다. 그때 살면서 처음으로 허리가 아작 나는 기분을 느껴봤다. 돈보다는 시간과 체력이 더 많았기에 가능했던 여행이었다.

그때보단 최소 10년은 더 늙어버린 내 몸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여행을 오기 하루 전까지도 로바니에미를 일정에 넣을지 말지를 고민했었던 결과

VR의 침대칸은 이미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고, 12시간을 앉아서 가야 하는 일반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이 12시간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걱정 반 그래도 무사히 열차를 탔다는 안도의 마음 반으로 좌석을 찾아 앉았다.


핀란드 VR 열차는 일반석 객실(예전 무궁화 호 객실과 비슷한 넓이)과 침대칸 그리고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침대칸엔 이층 침대, 간단히 샤워를 할 수 있는 샤워부스가 있었다.

2인실 4인실 등에 따라 크기는 다른 것 같았지만 안에서 편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일행과 함께라면 모를까 생전 처음 본 타인과 함께하기엔 오히려 일반석보다 불편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좀 못 씻고, 제대로 못 자는 건 마이너스 이긴 하지만 나는 다음에 혼자 야간열차를 탈 일이 생기면 또다시 일반석을 선택할 것 같다. 사람과의 거리가 필요한 나에겐 모르는 사람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침대칸 보단 다소 불편해도 일반석이 훨씬 마음 편안한 공간이었다.

좌석은 생각보다는 편했지만 그렇다고 침대처럼 편한 공간은 아니어서 잠은 오지 않았다.

열차는 끊임없이 어둠 속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8시 15분.

어두워서 창밖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점차 내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보면 헬싱키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9시 30분 헬싱키 도착

마침표를 찍지 못한 하루가 쉼표를 찍어가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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