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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적인 성우 씨 May 07. 2019

연애시대_#2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할 때

모임에 가던 중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내가 말했다.

“나, 고백할 거 있는데”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돼. 하지 마.”

“진짜? 죽을 때까지 말 안 해도 돼, 그럼?”

장난이려니 하던 남편은 잠깐 망설이더니 물었다.

“뭔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몰랐는데,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는데, 사랑인 것 같다고.

남편은  잠시 침묵했다. 나와 8년을 연애한, 결혼 후 연애기간의 두 배의 시간을 살고 있는 남자다. 내 부모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때론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남자다. 그 남자가, 매일매일의 동선을 빤히 꿰고 있는 남자가, 쉽게 다른 생각을 할 리 없다.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연예인이야?”      


"응" 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제야 남편은 웃었다. “누군데?”라고 물었고, “말해도 너는 몰라”라고 나는 대답했다. 실제로 내가 배우의 이름을 말하자, 남편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내가 어떤어떤 드라마에 나온 배우라고 설명해도 남편은 전혀 그를 몰랐다.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남편은 내가 틀어놓는 드라마만 오가며 볼 뿐이다. 그러니 내가 몰랐던 배우를 그가 알 리 없다. 남편은 실컷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맘껏 해. 자기는 그럴 만하지”     


'그럴 만하다'면 웃기지만 남편의 뜻을 나는 알고 있다. 부부동반 모임에 가면 내 친구들도, 남편 친구들의 와이프들도, 어떤 모임이건 우리들의 수다엔 연예인이 자주 등장했다. 태양의 후예라는 송중기가 온 나라를 들썩일 때는 송중기 얘기를, 구름인지 달빛인지 모르겠지만 박보검이, 도깨비 공유가, 또 박서준이, 그렇게 매번 바뀌는 인기 드라마의 남자 배우들을 말하며, 그녀들은 때마다 눈에 진심 어린 하트를 담곤 했다. 그녀들이 서로의 하트를 공감하며 돌고래 소리를 낼 때마다 아무 감정 없이 건성으로 듣고 있던 유일한 사람, 그게 나였다. 그런 나를 스물한 살 때부터 지켜본 남편이기에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남편은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킥킥대고 웃으며 사랑에 빠진 내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진심으로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2017년 이른 여름, 일어서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움직일 때마다 끊임없이 전기가 오는 것처럼 허리가 아팠고, 앉고 일어서기조차 쉽지 않았다. 나는 남편 팔에 의지해 겨우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왔고, 사흘 내내 파스와 찜질팩으로 허리를 달래며 누워 지냈다. TV에서는 하루 종일 드라마 재방송만 연신 틀어대고 있었다. 당시 아무 드라마도 시청하고 있지 않았던 내게, 한 번에 2개씩 4개씩 연달아하는 드라마 재방송은 지루한 하루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시간이, 하루가, 저절로 갔다. 남편이 퇴근하면서 저녁으로 먹을 걸 사 올 때까지 나는, TV를 보다가 졸다가 하며 그렇게 누워 지냈다.  



사흘 째였다. S방송의 그 드라마는 처음 보는 드라마였다. 내가 본 장면은, 남자주인공이 평소와 다름없이 명랑한 여자주인공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그다음 남자가 여자의 방으로 들어와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여자는 역시 명랑하게 아무 일 없었다고 얘기한다. 살인 누명을 쓰고 있는 여자는 집으로 오기 불과 얼마 전 목을 졸리는 겁박을 받았지만, 남자에게 말하지 않고 목에 있는 흉터를 가린다. 남자는 여자의 목을 빤히 보더니, 정말 괜찮겠냐고 묻는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그래. 그럼 됐어.” 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이지만, 방을 나간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 장면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로코나 멜로에서 흔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으면, 남자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누가 그런 거냐고 여자를 다그치거나, 조금 더 촌스럽던 시절로 간다면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니가 다쳤잖아!!!”     


그런데 그 남자는 말하기 싫다는 여자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괜찮겠냐고 한 번 더 물은 뒤,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이 과하지 않아서, 성숙해 보여서, 거기에 꽂혔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도 충분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방비로 있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그 장면 하나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그건 거의 20여 년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덕후들이 당하는 이 사고를 교통사고가 아니라 '덕통사고'라고 한다고 한다. 정말 나이와 상관없이 배울게 많은 똑똑한 선배들이다.




나는 십 대 시절에도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었다. 어떤 노래를, 영화를, 드라마를 좋아한 적 있었지만, 한 번도 그 가수나 배우 개인에게 빠진 적은 없었다. 때문에 나이 마흔이 넘도록 요즘 말하는 덕질이나 빠질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는, 연예인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GOD의 손호영을 보면서 갱년기 우울증을 고쳤다는 분들이, 이승기가 광고하는 것 중 아파트 빼고는 모두 다 샀다는 분들이 종종 TV에 나왔다. 난 그들이 가정 혹은 사회에서 뭔가 결핍이 있거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고는 가수나 배우를 상대로 그런 식의 애정은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내가 아무것도 아닌 그 장면을 본 후 가슴이 뛰었고, 나는 그 드라마를 1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유료결제를 해가며,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모두 본 결과, 나는 내가 그 남자주인공과 사랑에 빠졌음을 절절히 실감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그런 사랑도 가능하단 걸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그가 나온 모든 드라마를 다운받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16부, 20부작 드라마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중엔 54부작 주말드라마도 있었고, 51부작 사극도 있었다.



남편에게 내 사랑에 대해 고백한 후, 나는 그날부터 거실 소파에서 먹고 소파에서 잤다. 남편은 집에 오면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에만 눈을 박고 있는 나를 보았고, 그 옆에서 TV나 아이패드로 야구를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잤다. 나는 남편과 말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나오는 모든 드라마와 광고, 인터뷰들을 찾고 보느라, 그의 커뮤니티에서 나보다 덕질을 먼저 시작한 똑똑한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무슨 말인지 따라잡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나는 보다가 보다가 쓰러져 이어폰을 낀 채로 소파에서 잠을 잤고, 아침이 되면 겨우 일어나 남편에게 시리얼 한 그릇을 내밀고, 한 그릇은 들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그 와중에 남편과 예약 여행을 갔었지만 나는 그의 예전 드라마를 찾아보느라 정작 여행에서는 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 모임에서 잡혀있던 여행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들에게 내 사랑을 고백하고 그에 대해 설명하며 밤새 떠들었다.

그때 나는, 환희에 차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자기의 사랑을 뽐내고 자랑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겠는가. 연예인을 상대로 이런 나를 처음 본 선배들 역시 다들 신기해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남들에게 내 사랑을 말하는 것만으로, 내 행복은 몇 배가 되었다.        




그렇게 두 번의 여행 이후 어느 날부턴가 남편은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그제야 노트북을 잠깐 멈추고,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묻자, 남편은 그런 거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한 번 더 물었지만, 남편은 없다니까 왜 자꾸 묻느냐고 하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 같으면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가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혹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그걸 들어줄 시간이 내겐 없었다. 나는 다시 50부작이 넘는 사극을 보는데 몰두했다.        


그렇게 또 일주일을 보내고, 결국 우리는 싸우기 시작했다. 남편의 전에 없던 우울감을 처음 느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여러 번 이 배우와 상관있는 거냐고 물었었다. 남편은 아무리 물어도, 몇 번을 물어도 아니라고 했었다. 결국 싸움이 시작되자 진심이 나왔다.

지난 한 달이 넘도록 자신이 퇴근해 집에 들어와도 자신과 밥을 먹지도, 눈을 맞추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여행을 가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얼마 그러다 끝날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24시간을 소파에서 지내면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러는 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남편은 말했다.


나는 맘껏 하라고 한 지 이제 한 달 겨우 넘었다고. 내가 뭐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고, 찾아봐야 할게 많아서 그렇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그걸 이해하지 못하냐고. 신나고 재밌어하며 맘껏 하라고 건 너였지 않느냐고.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고 모든 싸움이 그렇듯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한참을 싸우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 생에 이런 날이 있다니. 나를 알지도 못하는 배우 때문에 남편과 싸우는 날이 오다니. 세상에 이런 '삼각관계’가 있다니. 심지어 우리 둘의 이 싸움이 진지하다니. 내가 갑자기 웃자 남편도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색하며 웃지 말라고 했다. 자신은 진지하다고, 자존심이 상한다고도 말했다. 이렇게 유치한 싸움이 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신에게도 적응할 시간을 주지, 왜 자꾸 다그치고 따져 묻느냐고,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남편의 말에 잠깐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에게 적응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는 남자.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 들어와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며 폐인처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위해 먹을 걸 챙기는 남자.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혼자 스포츠 채널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자기를, 한 달 넘게 한 남자. 그 남자가 곁에 있단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사랑은 의리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유행가나 영화에서 보이듯 가슴이 떨리고 벅차오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그런 애틋함과 두근거림으로 시작되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은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상대가 좋아할만한 일을 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 스스로 애쓰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잖아. 우리 둘의 생활이 제일 중요하니, 몇 시부터 몇 시까지만 봤으면 좋겠다라든가. 주말은 함께 보내자라든가”           

남편은 초등학생도 아니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보라 마라, 그게 서로 할 말이냐며 입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랬다.                


나는 이제 볼 것도 다 봤고, 무엇보다 그는 며칠 후 군입대를 하니 앞으론 이럴 일도 없다고, 그러니 그만하자고 했다. 그렇게 우린 화해를 했고, 치킨을 시켜 맥주와 함께 먹었다. 예전처럼 함께 야구를 보면서.       

 

야구가 끝나고 내가 말했다.     

“근데 좀 억울한 게, 니 친구들 와이프들을 보자. 그간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에게 빠졌었나. 한둘이었니? 난 이제 마흔 넘어 처음이잖아. 그래서 너도 맘껏 하라고 한 거고. 안그래?“     

그러자 남편은 대답했다.     

“그 애들하고 다르지. 그렇게 해마다 달마다 바뀌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 너는, 사랑이잖아”         

       



이승우 작가님의 [사랑의 생애]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내 안에, 내 몸을 숙주 삼아 바이러스처럼 사랑이 허락 없이 들어온 거라 해도, 어떤 선배의 말처럼 갱년기를 앞두고 내 호르몬들이 마지막 발악을 한 것뿐이라고 해도, 이유가 그 무엇이 됐든 나는 그 한 달 반 동안 사랑을 했고 행복했다. 그리고 짐작도 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늘 지루하고 심드렁하게 보냈던 내 지난날을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더불어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곁에 있어서 잊고 있었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왜 남편을 좋아하게 됐었는지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다. 채 두 달을 가지 못한 덕질과는 비교가 안 되는 남편과의 긴 시간이, 배려가, 존중이, 그간의 의리가 내 인생의 대부분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듯이.      


이쯤 되면, 오랜 연애와 그 두 배의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한참 늙은이들이 뭐 자랑할 일이라고 이런 유치뽕짝 스토리를 구구절절 꺼내놓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러는 데엔 이유가 있다.     




지난 주말, 그가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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