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서, 습관을 고칩니다>
첫 번째 이야기, 이제 시작합니다. 드물지만 그래도 너무 뜸하지 않게 저는 동생에게 물을 떠줍니다. 아마도 제가 정수기에 가까운 자리에 앉은 탓일 겁니다. 그래도 일어나서 열 보 정도는 걸어야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부터 물은 응당 제가 떠오게 됐습니다. 저는 그냥 정수만 떠왔습니다. 찬 물을 마시면 안 좋아할까 봐요. 근데 제 동생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냉수 반, 정수 반이야!” 너무 차가운 물만 주지 말고, 너무 미지근한 물만 주지 말고, 딱 적당하게 주라고 했습니다. 근데 이게 마음처럼 쉽나요. 제가 지금껏 쌓아온 습관이 있는데요. 양치할 때 칫솔에 물 먼저 묻히시나요, 치약 먼저 바르시나요. 전자든 후자든, 오늘 저녁에는 반대로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먼저, 이를 잊지 마시고요. 둘째로, 깝깝해도 참으시고요. 아시겠지만 본래 해오던 습관이 우리의 행동을 좌지우지합니다. 습관이 제2의 천성이라고 했죠, <햄릿>의 햄릿이었나 아니면 어떤 철학자였나. 기억이 안 납니다만.
네. 또 정수만 주었네요. “어라! 이미 정수만 했어!” 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로 미안함을 드러냅니다. 이건 ‘미안’ 한 일이거든요. 동생은 장난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자신이 익히 알려준 것을 잊으면 ‘관심이 없다’ 거나, ‘또, 또!’라 생각하거든요. 하긴, 제가 정말 바뀌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아예 정수기 위에다가 ‘찬물 반 정수 반’을 붙여 놓았겠죠. 아무튼, 제가 또 그렇게 정수만 가져오면 동생은 한 숨을 쉬며 말합니다. “에이, 참.” 근데요. 그렇게 여러 날 실수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제 습성이 교정되지 뭡니까. 이게 참으로 신기했어요. 어떻게 내가 이 습관을 고쳤을지 싶었죠. 그리고 재미난 광경이 빚어집니다. 동생이 “냉수 반, 정수 반!”이라고 하면 저는 “이미, 그렇게 했지요!”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어찌나 ‘케미’가 잘 맞는지. 저는 물어보죠. “물 맛이 좋은감?” 그러면 동생은 “물 맛이 참 좋다!”라고 대꾸하죠.
두 번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제 동생은 핫도그를 좋아합니다. 시중에서 파는 그 막 튀긴 핫도그도 좋아하지만, 냉동 핫도그도 참 잘 찾습니다. 냉장고에는 그래서 핫도그가 40개씩 있죠. 물론 저도 이따금 먹긴 합니다만. 이 핫도그는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습니다. 가끔 찜기에 올려서 찜으로 익히기도 하지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라서 보통은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핫도그를 녹이죠. 저는 보통 1분 30초만 돌립니다. 핫도그를 너무 녹이면 그것에 균열이 가고 수분이 날아가 맛이 더 없어진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동생은 저와 달랐습니다. 동생은 핫도그는 꼭 2분을 돌리라고 합니다. 저처럼 하면 핫도그가 맛이 없다고 하네요. 제가 가끔 핫도그를 돌려 오는데, 그럴 때는 제게 당부를 합니다. 1분을 먼저 돌리고 핫도그를 뒤집어서 1분을 또 돌리라고요.
정수기와 핫도그 이야기는 단순히 생각의 교정과, 1분 30초와 2분의 차이로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가족은 함께 어우러 살아가는 집단입니다. 서로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히 있죠. 나이가 들면서, 수많은 게 생깁니다. 제 동생도 어렸을 때는 이렇게 정수와 30초 차이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습성’이 생기는지 이렇게 바라는 바나 요구하는 기준이 세세해지더군요. 저는 동생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감히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되고, 앞으로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다만, 한쪽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의견이 틀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교정을 하면 좋습니다. 바뀌도록 노력해야죠. 동생은 계속 ‘냉수 반, 정수 반’을 요구하는데 저는 계속 ‘정수만’을 추구했다면 싸움이 일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가 제 의견을 내려놓자 분란이 줄어든 것이죠. 물론 제 의견도 있지만, 적당한 선에서 양보할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면 저의 주장을 과감히 내려놓는 노력도 필요했습니다. 물론, 무조건 양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의 주장이 매우 강할 때요. 그렇다면 이 선에는 어느 정도 타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로의 입장의 중도를 정해야죠.
동생은 제가 준 책을 2주에 한 권씩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슬쩍 보면 책을 읽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냥 놀고 있는 것 같았죠. 그래서 저는 자주 물어봤습니다. 책을 읽었냐고요. 동생은 제가 맨날 물어본다고 서운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러니 간섭으로 느껴진다고요. 제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라도 얘기해주지 않으면 더 안 읽을 것 같았거든요. 옆에서 누가 읽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야 잘 읽어진다고 봤죠. 저는 이 부분에서 중도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일주일에 5번 물어봤다면 지금은 1번 정도로 줄였습니다. 이렇게 적정선을 찾아서 고쳤습니다. 그렇다면 동생은 무엇이 바뀌었냐고요? 본인이 책을 읽으려 노력하더군요. 그게 보여요. 2주가 되면 책을 다 읽어놓습니다.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요. 처음에는 2주째 되는 그 하루에 다 몰아 읽었거든요.
저는 오빠라서 다행이라고 봅니다. 저 혼자서는 이렇게 행동을 교정하고, 생각의 허점을 파고들 수 없으니까요. 교정자가 있으면 더 수월하죠.
세 번째 이야기, 마저 시작합니다. 하루는 동생 이마에 여드름이 났습니다. 누구나 나는 여드름이고, 또 가족이기에 저는 무심코 말했어요. “어, 너 이마에 여드름이 있다!” 그랬더니 말입니다. 동생은 제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핀잔을 주지 뭡니까. ‘핀잔’이라니. 동생이 오빠에게 핀잔을 줄 수 있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말을 함부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렇다 봅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여드름도, 누군가에게는 아주 예민한 소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조금씩 세심해지는 듯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 아프지 않게 도울까 이제는 먼저 고민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오빠가 아니었다면 이런 점을 배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것들이 누군가의 마음엔 가시로 박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그래서 가끔 동생에게 미안합니다. 오빠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생각 없이 말한 게 있었을 텐데, 그게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오빠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이죠. 제가 나중에 장가를 가면 제 동생은 저와의 추억을 안고 세상을 바라보겠죠. 저는 좋은 기억만 주고 싶습니다. 행복한 추억만 동생의 기억에 앉히고 싶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지 않게 피해를 입혔을까요. 그런 생각에 지나간 시간에 반성문을 내리고 싶습니다.
요즘은 제가 이성친구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는데, 제 동생은 꼭 알려줍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야!” 저는 잘 기억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