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서, 재난지원금을 줍니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가 어수선한 이때. 한국 정부에서는 국민의 안녕을 위해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었습니다. 아시겠지만 1인당 15만 원씩 받았죠. 국민들은 너도나도 그 지원금을 받아 피폐해진 일상에 온기를 되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일본에서 수령자가 1%밖에 안 된다고 할 때 한국에서는 수령자가 95%가 넘었다고 할 정도로요. 저는 한국 정부가 국민 누구에게나 세금을 주려고 노력했기에 그 정도로 수령자가 많았다 봅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도 놓친 게 있습니다. 높으신 어른들은 한 가지를 크게 놓치셨어요. 아이들의 지원금입니다. 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의 몫으로 떨어진 지원금을 부모님의 손아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님은 그 돈으로 부족한 지출을 보충한다고 인정 없이 빼앗아 갔죠. 이것이 나쁜 일이냐, 반문하실 게 분명합니다. 다 같이 힘든 이때에 부모 빚이 없어야 자식도 행복하니, 이는 당연한 일 아니냐 그리 물으시겠죠. 저는 감히 묻습니다. 한 아이의 과자는 어디 있습니까. 한 아이가 그토록 사고 싶었던 장난감은 어디 있습니까. 오! 아이들의 순수함은 때 묻은 이들의 통장으로 흘러 들어가, 아이들의 기쁨을 착취한 것입니다!
제 동생은 너무 착합니다. 그래서 본인의 돈을 부모님께 다 드렸어요. 15만 원을요. 15만 원을요. 150000원을요! 십오만 원을요. 시입오 만 원을 요!
저는 이 학생의 순수함에 그만, 우울이 났습니다. 사고 싶은 노트를 사고. 그렇게 원하던 펜을 사고. 아니면 친구와 치킨을 먹어도 될 돈을, 어떻게 부모님께 모두 다 바치는지. 저는 안타까운 마음에 우울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오했죠. 제 재난지원금을 동생의 학용품 비용으로 써야겠다고요. 한 3만 원 정도 남았는데요. 아,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12만 원은 동생과 치킨을 먹고, 편의점에서 젤리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에 썼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3만 원이 남았고, 이 3만 원은 무조건 동생 학용품 비용으로 다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말했죠.
“이 3만 원은 무조건 네 학용품용이야!”
동생은 그런 저보고, “뭐? 어머!”라고 하고는,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동생은 너무 착합니다. 착해도 너무 착해요. 그래서인지 3만 원을 혼자 못 쓰겠다고 합니다. “엄마 맛있는 거 사드리자. 오빠 먹고 싶은 거 먹어” 그런다고 제가 작심한 일을 무를 수는 없습니다. “안돼! 이건 네 학용품 쓸 돈이야!” 동생은 그런 저를 보고 한 숨만 내쉬었죠. 돈이 줄지 않는다고요. 사용기한이 3일 남았을 때, 동생과 저는 지하철을 타고 문구점에 갔습니다. 좀 큰 지점에 가야 문구가 많다고 해서요. 그렇게 문구점에서 이것저것 골랐어요. 한 한 시간을 봤나요. 동생은 그런데도 도저히 못 고르겠대요. 아무리 봐도 이 문구점이 너무 비싸게 판대요. 그런 얘기만 다섯 번은 하더군요. 저는 안 된다고 무조건 여기서 사들고 가자고 했고요. 인터넷으로 산다는데, 재난지원금은 인터넷으로 못 쓰잖아요.
동생은 쓸 만한 물품이 없어, 돈이 도저히 안 써진다면서 제게 뭘 좀 사라고 했습니다. 저는 망설이다가 책에 밑줄 그을 용도로 쓸 색연필 두 자루를 사겠다, 합의했죠.
저는 오빠라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당부한다. 부디, 본인을 위해서 투자를 하기를 바란다. 오빠에게 돈을 쓰지 말고 부모님에게도 그러지 말고, 친구에게는 더욱더 그러지 말고 그냥 순전히 본인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쓰기를 바란다. 어떻게 보면 ‘너’의 인생인데, 다른 이들에게 너무 잘해주어, 오빠가 보기에는 마음 아프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 사회에서 안 좋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착한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는 사실을 저는 여럿 봐았고, 이런 마음이 결국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기에 본인을 위해 투자했으면 바란다.
“갑자기?”
갑자기 이리 말한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기회를 빌어 동생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오빠는 재난지원금을 또 받으면 이번에도 너에게 일정 부분 ‘투자’하려고 한다고. 학용품은 아니더라도, 가방이나 신발 같은 데에 사용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