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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겨울방학

윈터링

by 일상 여행자

마침내 엄마의 허리가 고장이 났다. 한 달 내내 모내기 품앗이를 이어가던 6월 끝 무렵. 그러니까 지금처럼 기계가 농사일을 도맡기 전 시절의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끼리 손 품앗이로 모내기를 함께 하던 때였다. 한 달 내내 쉼 없이 이어진 모심기를 마친 엄마는 응당 그러려니 한 통증에서 심상치 않은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초여름에 심은 벼를 수확한 가을 이후에는 한의원 문턱도 겨우겨우 넘어 다닐 정도로 절뚝였다. 그러나 용하다는 침을 맞으러 다녀도 효과는 신통치 않았고 결국 대학병원에서 디스크 진단을 받게 되었다. 국민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때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고 연말과 새해의 들뜬 분위기는 시내와 동떨어진 외딴집에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들썩임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수술 일정을 잡으셨다. 대구 대학병원에 서둘러 입원한 엄마는 위급 환자가 되었고 자연히 아버지는 보호자로서 집을 비우셨다. 졸지에 삼 남매는 부모 없는 겨울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집안의 경황없는 분위기를 눈치로 느낀 나는 맏이로서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다.

책상을 정리하는 방 청소와 마루를 물걸레질하는 정도의 돕는 수준이었던 집안일의 범위가 핵 구름처럼 순식간에 넓어졌다. 집안의 빠진 기둥 자리를 메꾸는 소임을 맡은 철없는 우리가 그 무게를 실감할 리는 만무했다. 태어남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아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을 그저 맞이할 뿐이었다. 나는 삼시 세끼를 담당했고 남동생들은 아궁이 불을 지피며 아버지와 엄마가 하시던 안팎의 일을 분담했다.

오랫동안 앓다가 입원한 엄마의 부엌에는 마땅한 찬거리가 없었고, 곰국을 끓여놓을 겨를도 없이 떠난 빈자리는 텅 빈 채였다. 겨울 땅에 묻혀 있는 김칫독이 유일한 먹거리였다. 라면이나 국수도 별식이었던 형편이었고, 흉내 낼 만한 레시피도 축적하지 못한 나는 살림 애송이에 불과했다. 더듬더듬 켠 석유풍로 불에 볶은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의 맛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퍼먹은 기억은 남아 있다. “누나가 가장 어른스러워 보였던 때였다”는 막내의 회상에 따르면 나의 어설픈 고군분투가 나름 그럴싸해 보였던 것 같다.

인근에 서너 이웃이 드문드문 살긴 했지만 동네에서 외떨어진 집에 아이들만 두기에는 걱정이 앞서셨던가 보다. 다급한 와중에 부모님은 종갓집 오빠에게 우리의 돌봄을 부탁하셨다. 방학을 맞아 본가에 와 있던 오빠는 낮에는 집안일을 돕고, 저녁이면 임시 고아들을 거두러 우리 집으로 왔다. 시골에서 어울릴 친구 없이 무료하던 차이기도 했겠지만 타고난 싹싹함으로 살뜰하게 챙겼다. 과자 보따리를 한가득 안고 오기도 하고, 어떤 날엔 제과점 빵과 달콤한 야식거리를 사 들고 왔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크리스마스였고, 오빠는 그야말로 산타클로스의 현신이었다.

대학생이었던 오빠는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최불암식 만담과 참새 시리즈 등의 유머를 전수해 주었고, 순진한 우리는 ‘마이는 동생이 입을 때까지 풍덩하게 입는 것’이라는 생전 처음 접하는 ‘마이동풍’ 언어유희에도 까르르 넘어갔다. 밤 10시 전에 꺼지는 안방 텔레비전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주말의 명화를 마음껏 보는 것은 물론이고, 송년 예능과 신년 영화 등 특집 프로그램을 새벽까지 마냥 즐길 수 있었다. 긴 겨울밤 부모님의 간섭 어린 애정을 대신하는 홍콩 누아르와 무협 영화를 섭렵하며 그간 금지된 문화 혜택을 풍성하게 누렸다.

그 겨울 종갓집 오빠는 외딴 시골 아이들에게 신문물의 선구자이자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 봇물 터지듯 접하게 된 새로운 세상은 디즈니랜드처럼 다채로웠고, 삭막한 겨울밤의 냉골을 환히 밝혀 주었다. 평소 없는 언니, 오빠 타령을 늘어놓던 맏이의 결핍까지 단번에 채워주었다. 부모님의 빈자리를 다른 온도의 따뜻함으로 보듬어 주었던 덕분에 어두운 시기를 그늘 없이 지날 수 있게 지켜주었다.

다행히도 아버지 등에 업혀 입원했다가 한 달 후 빨간 신발을 신고 퇴원한 엄마는 빠르게 회복되셨다. 수술 경과가 순조로웠다고 했다. 더불어 그해 우리만의 특별한 겨울방학을 보낸 나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겨울 지나 봄을 맞이하듯 모두 각자의 키를 키웠고,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 시절의 앨범을 펼치면 가장 조숙했다는 내 모습이 그해 겨울 졸업식 사진에 환하게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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