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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 여행자 Dec 26. 2023

그 시절의 작은 베이스캠프

청춘의 창가

  그 방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창문 때문이었다. 유난했던 폭염도 한풀 꺾이기 시작하던 여름 끝 무렵이었다. 그날의 햇볕은 나의 독립기념일이 맑은 날이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게 해 주었다. 집주인과 함께 방에 들어섰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배우처럼 창은 오후의 햇살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얇은 파스텔 톤의 커튼을 흔들며 지나가고 꽃무늬들이 반짝이는 빛 속에서 눈부시게 피어났다. 한 폭의 그림처럼 각인된 그 순간에 홀딱 반해 홀린 듯이 나의 첫 자취방은 단번에 간택되었다.

  물론 고를 수 있는 방의 범위라는 게 전 재산인 보증금 200만 원에 매달 감당할 수 있는 월세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방은 다세대 주택 한 층을 주방과 거실, 욕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나눈 5개 방 중의 하나였다. 자취를 허락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자들만 지내는 금남(禁男)의 집, 여자만 공유할 수 있는 셰어하우스 형태였다. 알고 보니 방의 한쪽 면 전체를 차지한 커다란 창은 거실 베란다 창문이었다. 큰 창 하나 보고 고른 그 방의 실체는 거실 일부를 나누어 만든 가상의 공간이었던 거였다.

  그럼에도 반대했던 상경을 감행해 친척 신혼집에 얹혀 지내다 마침내 독립해 얻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급한 대로 장만한 남루한 세간살이 속에서도 하루의 날씨와 계절의 풍경을 담아내던 커다란 창은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 하나밖에 없던 내가 누릴 수 있는 넉넉한 풍요였다. 휴일에는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기도 하고, 이층 창에서 내다보이는 도시 전망으로 객지의 고독을 달래기도 했다. 이웃집 된장찌개 냄새가 풍기는 저녁 무렵이면 엄마의 도마 위에서 뚝딱 만들어지던 음식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객지 생활의 숨통이자 축복의 빛을 들여주던 창이었지만 덕분에 그해 겨울은 평생 잊히지 않는 추위를 겪어야 했다. 남쪽 지방에서 올라와 겪는 낯선 서울의 겨울은 내게 유독 혹독했다. 집채 만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파묻혀도 지글지글 끓는 바닥이 무색하게 시베리아 벌판의 한기가 휘돌았다. 물과 살얼음을 담아내기를 반복하더니 애지중지 키우며 벗하던 물그릇 속의 행운목이 결국 얼어 죽었다. 이불 밖으로 내민 손이 시려 코만 빼꼼히 내밀고 후 불면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홀로의 나를 마주하며 느꼈던 외로움과 낯선 객지에서 부딪히는 서러움, 서툰 사회생활에서 닥치는 관계 속에서 오롯한 ‘처음’들을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겪던 시기였다. 그 방에서 깃발을 꽂은 백지 같은 나의 독립은 모두 ‘첫’이라는 단어로 채워졌다. 첫 직장, 첫 입사, 첫 퇴사를 두 번째로 만들어가며 사회생활의 폭을 넓혀갔다. 더불어 좌충우돌하던 일과 관계 사이의 갈등과 고뇌도 잦아들었고 차츰 안정을 찾았다. 낯선 것들이 주는 불편을 새로움이 주는 신선한 경험들로 즐기기 시작했고, 책임져야 할 것들을 감당해 내면서 자유와 책임의 무게를 깨달아갔다.

  그러나 익숙해진다고 해서 쉬워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용감하게 나섰지만 무참히 깨진 패잔병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고, 세상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달콤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골라온 초코칩 쿠키가 단맛보다 짠맛이 훨씬 강하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예고 없이 배신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아가는 방향의 궤도를 수정해야 했다. 무수한 실패와 도전의 반복 속에서 나의 방은 언제나 숨을 고르고 기운을 회복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주었다. 온전한 나의 동굴,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나서 추스를 수 있는 빛을 가다듬어 갔다.

  이후에도 계약 기간만료와 직장 이동 등으로 몇 번의 이사를 반복하면서 나의 방은 거처를 옮겨 다녔다. 반지하부터 오피스텔 등 여러 방을 전전하는 중에도 언제나 창문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의 방이 그러했듯이 무수한 자취방의 조건을 조곤조곤 따지다가도 햇살이 환하게 비춰드는 창 앞에서는 첫 번째 선택조건이 어김없이 큰 창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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