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관점 변화.
어린 시절, 난 잘 놀다가도 문뜩 엄마를 찾았다. 그리고 엄마의 품에 안겨 '죽기 싫다.'며 그렇게 울었다.
엄마 입장에선 이게 참 난감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때 나는 고작 6살 남짓이었다.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아이가 죽기 싫다고 우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우는 애를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교 신자이신 엄마는 그럴 때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환생하면 다시 엄마랑 아빠랑 만날 수도 있다.'며 날 달래셨다. 그러면서 환생에 관련된 여러 따뜻한 이야기들을 해주곤 하셨다.
사실 큰 위로는 되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난 진이 빠질 때까지 엄마 품에 안겨 울고 난 후에야 울음을 멈췄다고 한다.
난 왜 그렇게 죽음이 두려웠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이유는 몇 개 있었다.
내 첫 기억은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4살 때 밥을 먹다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 하얀 이불을 이마까지 덮은 채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본 것이 나의 가장 첫 기억이다.
당시 어렸던 난 죽음이 뭔지도 몰랐고 큰 슬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도 분명 어린 나에겐 꽤 강렬했던 모양이고 지금도 나의 첫 기억으로 또렷이 남아있다.
첫 기억이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것.
분명 이것이 어떻게든 나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이가 들어 자아가 성립되고 자존감이 생기면서 '나라는 존재가 소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나 한다. 보통 이 나이 때에 자아가 확실히 성립된다고 하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론 이런 장황한 설명을 떠나 단순히 죽고 나서 눈이 감긴 채 깜깜한 관에 눕는다는 것이 꽤 무서웠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던 아이였다. 다른 이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 이 나이에는 나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아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 '죽겠네' '진짜 죽고 싶다'는 말을 종종 입에 담게 된다.
단순히 짜증 나서 하는 말일 때도 있지만 정말 진심으로 죽고 싶을 때도 있다. 열심히 하는데 돌아오는 건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길을 잃은 채 삶의 의지와 희망이 상실되는 순간.
'살고 싶기에 죽고 싶다.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하던, 두려워하던 어린 시절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죽음을 입에 담게 됐을까? 더울 때 더운 줄 모르고 추울 때 추울 줄 모르던 우리가 왜 이렇게 쉽게 지치고 주저앉게 된 걸까?
난 이것이 우리가 등에 지고 있는 짐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늘어난 짐들의 무게를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발을 디디면 또 다른 짐이 등에 얹힐 것 같고, 더는 힘들어 걸을 힘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 걷는 걸 멈추고 여기 주저앉아 쉬고 싶은 것이다.
나이가 든 우리가 등에 있는 짐을 모두 내려놓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이 무거운 어깨의 짐들들 조금이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날 보는 이가 많아서, 기대하는 이가 많아서 내려놓을 짐이 없을 것 같지만 잘 찾아보면 분명 굳이 내가 져도 되지 않을 짐까지 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부터 하나씩 내려놓는 거다.
그래도 너무 힘들다면 미친 척하고 모든 짐을 다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은 내가 살고, 다시 걸을 힘을 내는 게 우선이니까.
언젠가 다른 형태의 짐들이 또 날 짓누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다시 걸어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