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정말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나는 바다처럼 넓고 포근한 아빠이다.'를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감정을 조절합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왜 안 했니? 뭐 했니? 억울해? 그럼 말해봐!" "왜 말을 못 하냐? 어?"
어느샌가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는 저를 느낍니다. '앗!' 하지만 이미 몰아붙일 만큼 몰아붙였습니다. 말이 길어졌고 아이들은 이미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저를 꺼내놓고 고치는 시간입니다. 제대로 잘해보겠습니다.
요즘 둘째 딸이 학교에서 수시로 속상한 일이 생깁니다. 그런 얘기들을 제게 해줍니다. 예전 같으면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감받으려고 했는데 잔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브런치를 쓰면서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통해 행동을 바꾸고 있습니다. 말을 더하기보다는 딸의 입장에 감정이입해서 호응을 해주기 시작했더니 아이들이 자기들의 일상을 말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함께 어울리던 애들이 있거든요. 근데 저만 빼고 갔어요. 암말 없이..."
"그래서 어떻게 했니?"
"할 수 없이 그냥 집에 왔죠."
"수업시간에 자꾸 저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힘들게 해요."
"그럴 때는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선생님께 도움을 구해봐~"
"......... 말.... 못..... 해.... 요."
"왜에? 무섭니? 아니면 왜? 선생님인데......"
"못해요." ?
"..................(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서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갸우뚱하는 저와 달리 아이는 울상이 됩니다. 멀쩡하게 열심히 키우고 있는 딸아이가 친구들 문제로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간식을 사주고 마음을 회복시켜 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아이는 얼굴이 통통 해지며 그런 일이 생길 때면 '새로 나온 거 사줘요. 젤리.. 속상해서 먹어야겠어요.'라고만 합니다. 심각하게 속상할 때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냥 '홈스쿨링'시켜 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지역에 이사 왔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적응해 보자고 했습니다. 자꾸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짝꿍 친구가 없습니다. 어울리고 놀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고 이미 그룹핑된 아이들 사이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점점 더 학교를 가기 싫어했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진행된 선거에서 반 회장으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늘 마음 힘들게 하던 친구들이 전부 회장선거에 나왔고 표가 분산되면서 둘째 딸이 회장이 된 것입니다.
당당히 반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아이는 반에서 입지를 굳힌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은근한 따돌림, 수업시간 걸핏하면 반대의견으로 회망을 놓았습니다. 학교 갈 때 '빠이~잘 다녀와!' 하면서 보냈는데 집에 들어오는 얼굴만 보면 그날이 어땠는지 느껴졌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던 날.. 대화하다가 그냥 멍해졌습니다.
"요즘도 똑같니? 선생님께 도움은 구하니?"
"아뇨. 못해요. 남자 선생님이거든요....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 거 같고......"
"그런데?"
"쉽지 않아요."
"?...?....?.."
길 가다가 시커먼 맨홀구멍에 쏙 떨어진 느낌입니다. 숨만 쉬면서 아이의 눈과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간식 먹던 손도 내려놓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자 담임 선생님일 때는매일 재밌었던 일, 선생님이 해주신 칭찬, 학교 수업에서 잘한 일, 도움을 구한 일에 대한 대화내용이 많았습니다. 남자 담임선생님과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아빠 같은 어른이 뭔가를 말하거나 "이것 좀 해달라" 등등의 제안이나 뜬금없는 대화에는 '그냥 얼음'이 된다고도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합니다.
둘째 딸이 아빠에 대해 한 말이 또 생각났습니다.
"아빠를 생각하면 좋기도 한데 싫기도 해요. 같이 먹고 놀고 좋을 때는 마냥 좋은데 혼내기 시작하면 엄청 무서워요. 덜덜 떨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 무서워. 그게 아빠야. "그런 이유로 아빠 같은 남자는 불편해했습니다.
"못해요" - 아빠 같은 사람들은 사실 불편해요. 겁도 나고. 그냥.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도 나이 지긋한 남자 선생님께는 도움을 구하지 못합니다. 속상한 일이 생겨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지냅니다. 자꾸 그런 일에 감정소모를 하다 보니 그냥 학교를 안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보니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아빠 때문이구나......'
그 대화 이후 정말 충격받고 놀라서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아빠에 대한 기억은좋은 거 조금, 무섭고 힘들었던 기억이 대부분이라서 늘 사회생활이 힘들어요."라고 할까 봐 걱정되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짝 노력해야 함을 다시 한번 잊지 않으려고 하고요.
첫 에피소드를 준비하면서 둘째 딸 말을 제일 먼저 번역했습니다.
한 자 한 자 적고 수정하면서 몇 번이나 멈칫했습니다. 가부장적인 언행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대화 당시의 당혹스러웠던 마음이 다시 떠올라서였습니다.
늘 함께 놀고 신나게 즐기고 항상 "해보자"주의인 유쾌한 아빠이지만 엄할 때는 덜덜 떨릴 만큼 '버럭'했습니다. 둘째 딸은 "아빠. 나의 사랑하는 아빠"라고 말해주지만 마음속에는 "아빠, 내겐 여차하면 무서운 아빠"인 것입니다. 그런 느낌은 바깥에서 만나는 다양한 관계에서도 걸림돌을 만듭니다.
앞으로 연재하는 동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아빠의 실수를 공개해야 해서 민망하지만 직면하려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아빠의 실수가 이어지고 상처받아도 아이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른이 되면 그 기억들이 '마음의 걸림돌'이 되어 평범한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제 스스로 다부진 다짐과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나가는 아빠 얼굴 표정을 보면 아이들의 행복지수를 얼추 알 수 있습니다. 빅맥지수처럼요. 객관적인 것은 아니고 제 느낌입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요즘은 아빠가 어떠니?" "쪼끔 나아졌어요. 아빠."라고 말해줍니다. "아빠가 노력하는 게 느껴져요."라면서 등을 '툭' 치고 지나갑니다. 그런 말에 은근히 흐뭇해하는 저에게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남편, 아이가 당신 기분 좋으라고 그렇게 말해주네요. 이쁜 딸...."
그렇습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저는 오늘도 아이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실컷 참다가 '버럭'해버린 아빠입니다. '사람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 이쁜 아들딸'을 위한 온유한 아빠가 되려고 합니다. 하루빨리 놀이기구 같고 소파 같은 아빠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