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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Sep 25. 2024

너무 배려하는 태도를 넘어, 내 입장을 말하는 연습

나의 배려를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B와 사이가 틀어진 C는 붉어진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간 B에게 받은 상처를 털어놓았다. 사방히 좁은 창문으로 막힌 카페에서, C의 토로는 길어지고 그가 받은 상처의 말들이 듣는 모두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던 C가 나에게 말했다. B는 나에 대한 험담도 스스럼이 없었다며 한 후임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대화를 나에게 전했다. 후임과 그의 동료들이 나를 좋아하고 멋있는 사람이라며 칭찬한다고 했더니, B는 인상이 구겨지며 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냐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시기에 나는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나의 노력으로 해낸 성과에 대해서도, 왜 내가 그런 성적을 거두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가 했던 모든걸 싫어했다고 한다. 


B와 나는 함께 밥을 먹으며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친구라는 울타리에서 지내던 사이였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같이 보내던 B는 사람들의 관심이 본인이 아니라 나에게 가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고, 그게 나를 욕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B에게 이 사실을 되묻지 않았다. 왜 나를 싫어하고 욕하냐고 따지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그 일을 따져서 흙탕물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B와 싸워서 생기는 감정적 피로를 피하고 싶었다.


 그 날 C가 말했던 모든 얘기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B의 뒷담화 대상이었다. 나는 B의 입장을 생각했다. C와 싸운 B는 계속 혼자인 상태로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B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나를 욕했냐며 B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인생을 그런 싸움에 시간을 버리는게 너무 싫었다. 한편으론 B를 불쌍하게 여겼다. 오죽 자존감이 낮으면 다른 사람의 노력을 비하하는지 B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B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일은 언제나 별거 아닌 일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B가 나에게 간간히 요청한 일을 들어주었다. 평소에는 기회가 없어서 들어주지 못한 일인데, 우연히 기회가 생겨 그 일을 B에게 건낼 수 있었다. 그 이후 B는 이렇다할 소식을 전하지 않았지만, B에게 긍정적인 일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전해주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가 나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으니 나도 태도를 어떻게 취해야 할지 어려웠다. 좋은일이 생기는데 왜 나에겐 그 과정과 기쁨을 조금이라도 전하지 않는 걸까? 이 생각이 들자 내 감정에 균열이 생기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왜 나에겐 따로 말을 하지 않는지 직접 물어보는게 맞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말을 붙였다. 


B는 내가 건낸 일에 대한 결과가 아직 없으니, 일의 과정에서 생기는 성과와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나에게 먼저 말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의 태도가 퍽이나 서운했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들리는 얘기 속의 B는 내가 건넨 일로 인해 무척이나 행복하고, 좋은 결과를 가질 것이 확실했지만 정작 나에겐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B도 그의 생각과 입장이 있지만 나는 그의 태도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예민한 사람은 세상에 관심이 많고 타인이 나에게 갖는 관심을 빠르게 알아채린다. B는 나의 선의와 배려를 당연히 여겨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라는 걸 그의 말에서 알아 챘다. 하지만 고마움이 없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껴달라고 구걸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과연 내가 느끼는 섭섭함이 오로지 상대만의 잘못일까. 내 마음을 되짚어보니 심연에서 꿈틀거리는 진솔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 섭섭해 하고 있네. 이 섭섭함이 생긴 이유는 내가 바라는 대로 그가 행동해주길 바라는 기대 때문이고, 내 기대가 채워지지 않아서 섭섭해하는구나.'

'이 섭섭함은 내가 붙잡아 느끼고 있는 것일 뿐, 그는 내 마음을 모를 수 있어. 내가 나의 마음대로 감정을 느끼듯, 그도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원하는 감정을 느꼈겠지'


내가 나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해보니 이 감정을 붙잡고 느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가 보였다. 그렇다면, 이걸 손에서 놓아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슴 위에 돌탑처럼 쌓인 무거운 덩어리를 하나씩 손으로 꺼내어 내리듯, 숨을 한 번 골라 내쉴 때마다 돌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곁곁이 쌓인 돌을 아무리 내려도 여전히 남아 있듯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고 말 처럼 쉬운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이렇게 돌보지 않으면 나는 이 돌에 짓눌려 죽어 버리거나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근데

그렇게 살긴 억울하잖아?


다 내리고 나면 별 것도 아닌, 언제 있었는지도 모를 상처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못한채로 살아가는게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시간은 조금씩 흐르고 이따금 무거운 마음이 올라와 공기마저 나를 압박하는 것 같을 때 다시 나는 숨을 골라쉬며 돌을 내리는 마음으로 나를 지켜봤다. 


'내가 섭섭함을 느낄 수도 있는거지. 그만큼 그 상대를 좋아했고, 좋아해서 배려해주고 싶었던거지. 다만 내가 나의 배려를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에게 과한 기대를 걸었던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으면 하는 배려와 기대를 너는 다른 사람에게 했을 뿐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수 있어. 타인의 마음을 빨리 알아채고 그가 원하는걸 세심하게 배려하는 건 나의 능력이고, 이건 다른 존재에게 기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야. 다만 이건 나의 능력이니까, 내가 앞으로 아끼고 싶은 사람에게 더 잘쓰면 돼. 이걸 고마워하는 사람에게만 전하면 돼' 


생각해보니 오랜시간 동안 B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했던 말을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무례한 실수들, 툭툭 내뱉듯이 던지는 말투와 타인에 대한 험담. 사람들이 그와 가까이 해서 좋을게 없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에겐 그럴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아쉬운게 있다면 이 부분이었다. 내가 이런 말들을 귀기울여 듣고,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할 줄 알았다면 이런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나는 상처 받았고, 후회했다. B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여 그를 싫어하는것 보다, 조금 더 신중하지 못했던 나의 실수를 후회했다는게 가깝겠다. 하지만 B를 너무 미워하거나 나를 자책하지 않으려했다. 과거와 다르게 타인의 기분을 위하여 나의 숨을 죽이는게 아니라 담담하게 내 입장을 말했던 나의 모습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기대와 다른 일로 상처를 받아, 찌릿하게 아픈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상황을 대하는 나의 행동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괜찮음을 위로한다. 감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나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태도 또한 기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예민한 사람은 감정선이 민감하여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바를 빠르게 눈치챈다. 예를 들어 단체 모임을 위한 일정을 정할 때, 약속 장소나 메뉴를 빠르게 정하여 정리하는 것도 정해지지 않은 일을 빠르게 처리하여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호함을 줄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아무리 기대가 없는 사람이어도 어느정도의 배려는 받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관계에 기대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소용이 없다. 인간관계 문제는 기대의 차이에서 생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민한 사람은 불편한 일이 생겨도 타인이 더 불편하게 느낄까봐 참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하지만 그럴 수록 나만 아는 상처만 많아지고 이 문제는 언젠가 곪아서 터지게 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문제가 어떤 상처로 터질지 모른다는 것이고, 이 문제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타인의 무례가 나를 침범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선 분명하게 입장을 말해야한다. 당신과 타인이 상처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상처를 피하는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극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단정하게 전하는 것은 서로를 위해 필요하다. 대화로 풀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자. 별로 중요한 인연이 아닐 것이며 거기 까지의 유효기간을 가진 관계일 뿐이다. 


상황이 변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래서 어제 알던 그 사람의 모습이 오늘은 전혀 아닐 수 있다. 타인이 하루 만에 어떤 일을 겪고 달라지는지 우리 각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생긴 문제와 변한 생각을 내가 다 책임질 일도 아니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일이 생길 때 마다 타인을 탓하기 보단 나를 돌아보는게 더 빠른 처사이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들여다보고 감정의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바라보면 신기하게도 별게 아닌 일처럼 느껴지는 일이 더 많다.


살면서 상처 받는 일은 계속 생길 것이다. 미리 준비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고 안생기는 일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우연에서 슬픔과 기쁨이 생기는 일을 선택할 순 없지만 그 일이 생겼을 때의 내 태도는 선택 할 수 있다. 나의 배려와 사랑을 고마워하지 않는 상대를 또 만난다면 다시 아파하겠지만 그 또한 사랑 받고 싶고 돋보이고 싶은, 외로운 존재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며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예민함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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