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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02화

빛과 열

by 슬기




“카페 솔레이입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카페라떼 따뜻한 걸로 한 잔 주세요.”

지난 번 신청한 독서 모임에 처음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주말에 일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라 나서기 전부터 설레었다. 음료를 받아 사람들이 모여있을 법한 자리를 찾았다.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에 대여섯명이 둘러 앉아서 책을 올려둔 모습이 보였다. 그 중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여기가 맞으니 오라는 기색이었다. 눈을 피하기가 어려워, 그를 보는듯 마는듯한 어색한 표정으로 테이블로 갔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오셨나요?”

“네. 이루나 라고 합니다.”

“한동제 입니다. 모임 참가 방법 간단히 알려드리고 바로 시작할게요.”


모임은 책의 내용을 소재로 펼쳐졌다. 모르는 이야기를 새로이 듣기도, 알던 이야기에 공감을 드러내기도 하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책 이야기가 끝나니 시덥지 않은, 영양가 없는. 가볍고 유쾌한, 의미 없지만 즐거운 말들이 오고갔다.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꺼내 놓았던 책을 요리조리 만지다가도,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가는게 더 재밌게 느껴졌다. 느즈막한 오후에서 저녁이 되자 모임도 끝이났다.


“오늘 모임은 여기서 마무리 할게요. 시간 괜찮으신 분들은 같이 저녁식사하시고, 일정 있으신 분들은 다음에 또 봬요.”


모임 첫 날이라 낯선 사람들과 밥을 먹을지 말지, 어찌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한동제는 내게 말을 걸었다.


“루나 님. 혹시 오늘 식사 괜찮으세요? 모임하고나면 시간되는 분들끼리 밥 먹으면서 얘기 나누고 헤어지거든요.”


한동제의 제안에 약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낯선 감정은 온데간데 없이 원래 알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듯 그들과 재밌게 노는 시간을 보냈다. 식사로 시작한 자리에 6명, 다음 날 일요일에 일정이 없었던 사람들끼리 맥주를 마시던 3명, 애인이 없는 밤 11시에 2명. 그게 나와 한동제가 되었다. 나와 한동제는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모임과 관련 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어떤 일을 하는지, 대학은 어딜 나왔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생일은 언제인지, 몇시에 일어나고 몇시에 잠을 자는지….


정각을 가르키는 시계는 밤이 깊었음을 말해주었지만, 나와 한동제는 서로를 쳐다보기 바빴다.

한동제는 자기가 잘 아는 조용한 선술집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대뜸 자신의 이름이 봄을 맡은 동쪽의 신이라는 뜻을 가졌다며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 놓는 그 사람에게, 내 이름은 달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맞받아쳤다.


“동쪽에선 해가 뜨잖아요. 서쪽으로 지고. 지고나면 달이 보이고요.”

“알아요.”

“해는 달을 향해 가요.”


더 이상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끊이지 않는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내 인생에 걸어 오겠다는 것을. 우연일까. 모르겠다. 아니, 봄이다. 봄, 그러니까 3월, 4월. 벚꽃, 유채화 그리고 장미까지. 분홍과 노랑같은 색깔이 제각각 피어나 눈부신 공기가 폐에 들어와 오랫동안 머물러 온 마음을 어지럽히는 봄이왔음은 확실히 알겠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설 무렵,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섰다. 초봄이라 밤의 온도가 낮았다. 팔짱을 가득끼고 몸을 웅크린채로 걸으니 춥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한동제는 내 옆에서서 보폭을 맞추어 걷다가, 춥다는 말에 조금 더 가까이와 걸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무색했다. 취기가 오른 몸은 분명 뜨거웠을 것이다. 착각이었겠지만, 한동제가 가까워졌을 때 나는 덜 춥다고 생각했다. 해는 달을 향해 따라 온다더니, 지금 이 사람이 내 곁으로 걸어오는게 이렇게 투박하고 순수하게 느껴질 일인가.

택시가 세워진 횡단보도에서 우리는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를 남겼다.


“루나 씨,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자 택시가 출발했다. 나는 고개를 젖혀 눈을 감았다. 독서모임에 처음 나갔고, 처음 본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과 밥을 먹었고, 한동제라는 사람과 술을 마셨다. 오늘의 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일을 겪었다. 재밌었지만, 한동제가 신경이 쓰인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음이 어지럽다. 어서 잠을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어떻게든 되어있겠지.


다음 날 눈을 뜨니, 점심 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2시였다. 푸후- 술김이 풍기는 한숨을 폭 내쉬다가 몸을 일으켜 물을 마셨다. 눈을 떠서 걸었는데, 서서 눈을 감고만 있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띵동-하는 메시지음이 울렸다.


“어제 잘 들어가셨나요?”


한동제였다. 어색한 얼굴을 겨우 마주보던 사람이 살가로운 안부문자를 보냈다. 메시지 창에 떠있는 그의 사진을 본다. 정체가 없는 사이인데, 묘한 기류가 생긴 사이이다. 잘 잤냐는 말이 너무나 낯설어 빠져서, 어떻게 답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잘 잤냐는 인사를 받아쳤다간 어설픈 대화가 될 것 같았다. 이리저리 주워담은 말로 화제를 돌렸다.


“네. 다음 주 모임에 나오시나요?”

“다음 주는 수요일 저녁 모임에 참석해요. 그래서 주말엔 안가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갑작스레 일상을 묻는 사람이 생기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잠시 핸드폰을 내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다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루나 님. 내일 일 끝나고 뵐 수 있을까요?”

“늦게 퇴근하는 일정이라.. 밤 10시가 넘어야 퇴근해요.”

“루나 님만 괜찮다면 저는 괜찮아요. 일하시는 곳으로 제가 갈게요.”


늦은 퇴근이 괜스레 신경쓰였다. 괜한 불편감이 올라오자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지, 바쁜척하면서 거절을 해야하나. 한 편으론 뻔뻔하게 한동제가 나를 보러 온다는 걸 반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봄이 오는 계절을 인간이 거절할 수 없듯, 한동제가 오는 걸 막아서고 싶은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네. 내일 봬요.”


그 이후 한동제는 월요일 뿐만 아니라 주중에 나갔던 수요일 모임이 끝난 후. 그리고 목요일에도 나를 만나러 달려왔다. 밤 10시 10분, 밤 10시 30분, 몇 일, 몇 주. 우리는 어두운 거리에서 손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가로등 불빛은 세상을 밝히기엔 미세하고 약했으나 내가 그에게 걸어가기엔, 헛딛지 않을 만큼 밝았다. 나를 보며 웃는 한동제의 얼굴엔 온기가 촘촘히 스며있었다.


초봄은 어느새 완연한 봄으로, 낮과 밤이 따뜻한 공기로 채워지는 시간을 향해 흘러갔다. 늦은 저녁에도 한 걸음에 달려오는 한동제와 나는, 길어진 시간을 따라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퇴근시간은 한동제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내가 동제에게 마음을 전해야겠다.


여전히 멀리서 손을 흔드는 나와,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는 동제는 반가운 인사로 서로를 맞이했다. 나는 동제를 위해 망고빛 튤립을 준비했다. 한참을 튤립을 바라보던 동제는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거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이름 얘기하면서, 내 이름은 해의 뜻을 가졌고 너는 달의 의미를 가졌다고 말한거.”

“아, 기억나지. 갑자기 이름 뜻 얘기하면서 해는 달을 향해 간다고 말했잖아. 근데 그거 진짜야?”

“나는 그렇게 봐. 하루가 시작할 때, 달은 분명 떠있거든? 그 때 해가 보이기 시작해. 달을 보고 해가 떠서 달을 향해 가는거지.”


“그럼 해가 질 땐? 달이 오는거야?”

“달은, 오지 않아도 돼. 달은 햇빛을 받아서 보이는거라, 그냥 빛나기만 하면 돼.”

“근데, 달이 해에게 가고 싶을 땐 어떻게 해?”

“해는 항상 달을 비추고 있어. 때론 안 보일 뿐이지. 항상 달을 향해져 있으니 마음만 해에게 두면 돼. 루나야, 내가 항상 너에게 갈게.”

한동제는 내 손을 잡고 한땀 한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구에서 보면 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 눈으로 직접 모양을 볼 순 없지만, 동그란 모양 그대로이고. 내가 안보이더라도 너를 향해 있다는거, 잊지마.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당겨 동제를 안았다. 나와 가까워지는 동제는 제 팔을 내 목덜미에 엮어 나를 안았다. 동제의 손에 들려있는 튤립이 내 코 앞에 놓이자 푸릇한 내음이 난다. 점차 동제의 체온이 스민다. 이거구나, 나를 보며 웃던 네 얼굴에 별처럼 박힌 온기의 정체가.


아른 아른 올라오는 저 따스함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가까이 보면서도 먼저 만져보지 못했던 너의 온도가 기어이 나에게 성큼 성큼 걸어 오는구나. 기어이 우리가 서로를 안았구나. 튤립을 타고 오는 슴슴한 내음과 동제의 체온은, 동제를 통해서만 보는 세상이었다.


너를 만나야만 보이는 세상이,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그가 스스로를 태양과 같다고 한 말에, 나는 달임이 분명해졌다. 뜨거운 해와 달리 차가운 달. 모양이 바뀌고 점차 차는 달. 완성된 보름달의 절정이 되기전,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절정을 이루고 나면 다시 반대의 모양새를 비춰내는 것. 온전한 순간을 향해가지만, 드리워진 어둠을 늘 가지고 있는 것. 내 이름이 이루나인 것, 그리고 정말 달 같은 삶을 살아온 것. 반대편의, N극와 S극의, 낮과 밤의. 너무도 다른 세계에 살았던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동제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정오의 태양 같은 동제의 열기가

깊은 심연을 담고 사는 달과 같은 나를, 담아 줄 수 있을까?

동제가 내 삶에 들어오는 걸음만큼 그에 대한 책임감, 정체 모를 미안함,

혹시나 하는 기대감, 가보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생겨났다.

사실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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