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제와 나는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마음을 내보이며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함박웃음을 짓는 사이가 되었다. 커다란 설렘을 안은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대로 존재하여 나를 가득 채웠다. 한동제와 나의 삶은 서로를 향한 전진으로서 처음엔 일상을 뒤흔들었고, 때론 멈추어 가만히 존재하는 보통의 하루를 만들어갔다. 방문을 넘어서면 바깥이 펼쳐지듯, 함께하는 시간과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 이원적으로 공존했다. 그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이 점차 어색해진다고 느꼈을 때, 어쩌면 이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는 시간을 없애고 지금보다 더 가깝게 사는 시간을 만들어갈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껏 혼자 보내온 시간을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 지어가는, 낯선 용기를 내어 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여전히 나의 일상은 혼자 시작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알람시계가 부산스럽게 울렸고, 나는 습관처럼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하루를 살아갔다. 오늘은 출근 전에 요가수업에 가는 날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실로 걸어나가 물을 마시며 싱크대를 쳐다보니, 어제 먹다 남은 미역국 그릇의 설거지를 못한게 보였다. 물잔을 내리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제 퇴근은 어떻게 했었더라?’
늦은 야근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 왔을 땐 밤 10시 30분이었다. 나는 유학원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고, 상담이 끝나면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언어 수업을 하는 일을 해왔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일정상 저녁을 먹지 못한다는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밥을 먹지 못하고 일한다는게 썩 기분이 좋진 않지만, 견딜만했다. 일이 끝난 후엔 미처 채우지 못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국을 데웠다. 축쳐진 어깨 아래로 힘 없이 늘어난 손은 국 냄비 아래의 불을 켜고, 국이 끓기 시작하면 대충 밥을 말아 먹었다. 맛을 느끼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인 식사를 하며, 가끔 이게 다 누구를 위한 짓인가 한탄스럽기도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식사는 항상 이런식으로 끝이 났다. 어제하지 못한 설거지를 해치우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 서랍켠에 올려둔 운동복을 챙겼다. 현관문 앞 거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얼굴을 보며, 약간은 피곤하게 파인 눈 두덩이가 신경쓰였다 손으로 눈자 위를 만지다가 볼까지 쓰다듬었다.
‘오늘도 부지런히 살자.’
머리에서 떠돌아 들리는 저 한 마디를 곱씹으며 현관을 열어나왔다. 간만에 비가 내렸나보다. 오랜만에 느낀 추위가 아스팔트 바닥에 깔려있다. 냉랭한 기운이 어깨와 배를 움츠러 들게 만든다. 축축하고 차가운 지면 위로 설익은 햇빛이 빛춰진다. 텅빈 이른 아침에 비춰지는 햇빛이 약간의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낮을 향해가는 경계선에서, 오늘도 잘 해내가라며 몸을 이끌어주는 것 같다.
요가원에 도착해 매트를 깔고 좌선으로 앉아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함께 운동을 하는 분들이 하나둘 도착하며 부산스러운 발걸음이 이곳저곳을 향하고 있다. 선생님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몸을 정돈하고 인사와 함께 운동에 따라간다. 한참 요가가 흐름에 맞게 진행되던 중에 선생님이 내 곁에 오셔서 자세를 고쳐주셨다.
“어. 루나 님. 방금 하신 동작이 조금 덜 나오시네요. 그치만 과도하게 동작을 만들기 보다는 지금 자세에서 무릎을 조금 구부리셔서 천천히 버텨보세요.”
쉽게 동작을 잘 해내고 있는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말을 듣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순간에 괴로움을 선택하는 건 마음이다. 가시 돋힌 마음속에서 소근소근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 못해? 좀 더 잘해봐.’
또 시작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가 선생님은 잘잘못을 말하고자 한게 아니었다. 단지 나아지는 방법을 알려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에게는 감사를 느끼면서도, 나 스스로에게는 채찍이 들리는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 뿐이라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머리를 울렸다.
‘자기 전에 스트레칭을 10분씩 더 해볼까?’
‘요가원에 가는 횟수를 더 늘려볼까?’
머리 한 쪽이 아파오는게 느껴지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무게감 조차 느껴지지 않는 강박이랄까. 내가 해왔던 일에 비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이정도 복잡성은 나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더 잘 해보라고 말하지 않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항상 잘 하라는 말을 알람시계처럼 해댄다.
찜찜한 기분과 땀으로 축축히 젖은 몸을 세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오늘 따라 초봄의 꽃샘추위가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추위에 움츠러든 몸을 이끌고 요가에 다녀온 아침을 되돌려본다. 잘했다는 기쁨을 느끼기 보단, 더 잘 할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을 머금었다. 책상 앞 의자에 무거운 몸을 기대어 앉아, 매일 매만지는 스케쥴러를 펴서 들여다본다. 요가로 적힌 칸 옆에 화살표를 그어 요가를 더 잘하기 위한 방법으로 요가원에 가는 횟수를 하루 더 추가하기로 적는다. 다음주, 다음달까지 금요일 아침에 더 나가야겠다. 언젠간 더 잘해내겠지 생각하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4주 전, 새로운 할 일을 적어둔 칸이 눈에 띈다. 그곳에 한참 시선을 머물러두었다.
이 날 이었구나. 한동제를 만난 날.
자정전까지 새로운 독서모임을 신청한다고 적혀있었다. 일에 매여진 삶을 쳇바퀴처럼 살다보니 쉬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노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삶을 반복했음을 느꼈다. 매일 똑같은 얼굴로 출근하고, 똑같은 커피를 마시며, 나의 삶보다는 타인의 삶의 목적을 위한. 그러니까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학생들의 성적과 안위를 우선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오며, 그걸 당연시여겼다. 내가 원하여 선택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불만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겉보기엔 평온하고 아쉬울 게 없는 조용한 반복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째질듯한 굉음이 머리속에서 들려왔다.
‘이래선 안돼!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고!’
무엇을 두고 안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나의 평범한 일상을 이래선 안된다고 소리치는 것일까.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는 말속에는, 지금의 삶은 헛점투성이이며 기대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미완성이라는 지적이 담겨있었다. 몸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는 굉음의 진동은 오로지 나의 내면만 소용돌이처럼 흔들 뿐이었다.
소리없이 들리는 굉음, 무자비한 파장, 제대로 된 삶을 살라는 강한 경고. 갑자기 들리는것 처럼 보였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말소리. 내 안에서 울려퍼지는 이 소리를 가만히 품으며, 언제부터 들린 소리인지 태초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곱씹다보니 떠올랐다. 스무살, 여름 무더위에서 태어난 이 경고음의 정체를.
갓 스무살이 되었던 여름에 시작된 자각은 이러했다. 그 날은 푹푹 찌는 삼복더위가 한창인, 목과 등에 송골송골한 땀이 맺혀 뼈를 따라 흘러내리던 무자비한 날이었다. 맥아리 없이 늘어진 몸으로 리모콘을 돌려 TV화면을 넘겼는데 종영된 드라마를 재방송하기 위한 광고 영상이 떴다. 드라마를 내용은 본인이 공주인지 모르고 살았던 평범한 여자의 인생역전 스토리였다.
거칠고 불행한 일생을 살던 한 여자는 원래 과거 황족의 숨겨진 딸이었고, 시간이 지나 황녀로 밝혀지면서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사는 이야기가 소재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고 살아왔던 정체를 다른사람의 도움으로 찾게되고, 백마탄 왕자와 사랑을 하게 되며, 끼니를 걱정하며 억척스럽게 살던 시절을 잊고 따뜻한 대접속에서 살아가는 결말을 맞이했다.
드라마는 ‘착하게 살면 복이와요’ 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사람들의 희망 가득한 욕망을 담아 현실을 잊게 만들고 싶은 것일까? 제 삶을 살다보면 당신을 지켜보던 신과 같은 사람이 알아줄 때가 오고, 언젠가 당신은 몸과 마음은 평온에 닿아 희희낙락 하게 될 것이며, 고통스러웠던 불행은 끝나고, 웃을일만 남은 삶으로 인생 역전을 하게되는, 인간의 소망을 대신 보여주는 것일까? 그러나 황녀의 스토리는 내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백마탄 왕자의 완장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이 생겼을 뿐이다.
‘저건 드라마라서 가능한 거지. 인생이 뒤바뀌는 극적인 반전과 우연한 발견은 현생에서 생길 수 없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망상으로 채우며 살 순 없잖아. 드라마로 시간을 때우지 말아야 겠다. 내 노력으로, 내 능력을 키워서 살아야만 해.’
구원의 서사는 드라마라서 가능한 것이라는 걸, 나는 너무 일찍 깨달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지 않고 부족함을 찾아 스스로 채워나가는 것. 최선을 다해 일생을 가꿔나가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인간적인 합당에 가까웠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이 청춘의 그림체였을지라도, 나는 중력처럼 무거운 각성을 어깨에 올렸고 그 답을 찾으려 애썼다. 가끔은, 무시하고 싶었다. 내가 만든 각성으로부터 도망쳐나와 새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어디에 앉혀져도 괜찮을, 깃털과 같은 가벼움을 처절하게 동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일이면 사라질 놀음은 표면적인 위로였고, 나는 내가 만든 다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제비가 집을 찾아오듯, 각성과 다짐을 이정표로 삼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더위에 무너진 몸을 일으켜 부랴부랴 방치해둔 달력을 들여다보니, 다음학기 수강신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대학 동기들과 함께 학교 카페에 모여 함께 들을 수업을 미리 보자고 제안했다. 몇일 뒤 우리는 함께 모여 시간표를 보며 잡담을 한참 늘어뜨리다가 미술관련 교양수업을 얘기했다.
“야. 여기 세현관에서 수업하네. 우리 단대랑 가깝고 수업 끝나면 바로 학식가서 밥 먹기 좋은데 4시 교양 수업 <기초 미술사 이해> 이거 어때?”
“좋은데? 금요일 수업이라 수업 끝나고 놀다 가기 딱 좋다.”
시간표를 만들어 다가올 반년을 설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루고자하는 특별한 목표를 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부터 정하는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몇 일 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동기들이들과 함께 미술사 수업을 들으러 나섰다. 큰 원형 강의실에, 얼굴을 모르는 학생들과 띄엄띄엄 앉아 담당교수가 오길 기다렸다. 짧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겨가며, 다소 피곤한 얼굴의 교수가 들어왔다. 프레젠테이션을 띄우며, 미술사라는 수업에 걸맞는 차분함으로 무언가 설명을 이어갔다. 교수의 짧은 설명을 끝으로 함께 다음 수업을 기약하는 인사가 나오자 강의실은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로 가득찼다.
“빨리나와!”
부산스러운 분위기에서 빨리 나오라는 동기의 부름을 따라 좁은 문을 나섰다. 동기들을 찾는 와중에, 콘크리트 벽 기둥 아래에 쌓여진 교내신문이 보였다. 개학에 맞춰서 신문을 냈구나 싶어 가까이가서 한 부를 집어 들어 가방에 우겨 넣었다. 동기들과 나는 약속이나 한듯 식당으로 향하며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뜨겁게 익혀진 돈까스를 나란히 식탁위에 올리고 하나씩 썰어 달큼한 고기를 씹어 먹으며, 대화가 오가던 중 2학기 축제가 언제 열리는지 궁금하다는 말이 나왔다.
“아! 나 아까 신문가져 왔는데 한 번 확인해보자.”
밥에 묻지 않게 신문을 짧게 넘기며, 지면 아래를 훑어 보았다.
‘1학년 2학기 교직이수 신청? 아, 이거 너무 괜찮을 것 같은데?'
대학 생활을 이 과목을 통해 자격증을 받아내는 것이 꽤나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 목적이 향하는 돛대가 이 신문에 적힌 글자를 통해 세워졌다. 분명히 승선 기회이다. 승선할 수 있는 티켓을 잡아, 이곳으로 가라는 강한 계시임이 분명했다. 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고, 인생이 뒤바뀌는 우연한 발견을 목격한 것이다.
다음 날, 신문에 적힌 요강에 따라 심사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면접을 기다렸다. 한 달 뒤, 면접날이 되었고 떨리는 얼굴로 면접실로 들어갔다. 무거운 안경알을 코 끝에 겨우 걸치고 고동색 소파에 등을 기댄 늙은 교수는 내가 제출한 서류를 넘기며, 나를 올려다 보길 반복했다. 왜 이걸 하려고 하냐라는 질문이 쐐기였다. 그 쐐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더 단단한 대답을 내놓아야했다. 내 대답은 오래전부터 교육업에 종사하고 싶었다는게 전부였다. 오래된 진심을 간절히 말했다.
면접이 끝나고 나서 두 어달 사이에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우연히 잡은 신문을 보고 기회를 읽어낸 시작과 진심을 다해 드러낸 정성까지 온 것 같았다. 지금 까지의 일은 모두 다 행운의 여신이 이끌어낸 운의 신호임이 틀림 없다. 신호를 따라온 이 길은, 끝끝내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다.
2주 뒤, 합격자 발표날이 되었었고 나는 모니터에 적힌 ‘PASS’ 라는 4개의 알파벳을 볼 수 있었다. 짜릿했다. 너무나 기뻤고, 이대로 살면 되겠다는 신념이 생겼다. 마치 덩그러니 쌓인 사방의 어둠을 벗어나, 작은 빛을 밝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빛은 찾아낸 행운이자, 직접 만들어 낸 결과이자, 행복이었다. 이 계기를 통해 나는 작은 발견을 찾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곡히 쌓인 결과에 기뻐하며, 행운을 현실로 당겨오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노력했다. 갑자기 구세주가 나타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주는 드라마 같은 기적은 없을지라도, 마음이 향하는 곳에 귀를 기울이며 삶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각성한 인간이 되어보자고 믿은 것이다.
적토마의 마력처럼 달려가는 나의 모습엔 강인한 에너지가 있었다. 꽤나 빛이 났고, 그럴싸했다.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다운게 분명하니까. 그러나 내 노력 속엔 즐거움이 없었다. 승선한 배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늘 긴장을 하고 있어야하고, 파도와 비를 걱정해야했다. 때론 멈추고 배를 정비해도 좋았을지 모르지만, 그럴 떄마다 멈춤에 대한 채찍이 들려왔다.
‘노력은 힘이 드는게 당연해. 내가 선택한 거잖아. 원하는 걸 성취하기 위해 감당해야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끊임 없이 나의 쓰임과 완성을 말했다. 나는 이 목소리가 맞다고 믿어야 무너지지 않는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선인지 악인지 모를 그 날의 목소리는 멈추지 못하여, 이내 나의 굴레가 되었다. 틈이 없이 균질한 속도를 내며 타닥타닥 굴러왔다. 내 마음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거대한 추가 되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무겁게 커지고 있었다.
그 굴레는 스무살 대학생의 시간을 당장의 행복을 향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오지 않을 미래를 준비하도록 굴러갔고, 지금이 아닌 나중의 행복을 위한 준비시간을 만들어갔고, 기쁜 날 웃음에 취한 환희를 재빨리 서랍에 넣어야 했던 날들을 쌓아갔다. 내 염원을 성취 하는 것은, 안락보단 긴장의 시간이 많아야 했다. 교직이수를 통해 받은 자격증이 교육 전문가로 발딛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로 보여질거라 기대했다.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공부를 할 때도, 이 모든 과정이 또렷한 결과의 증명이 되길 바랬다.
나는 끊임없이, 계절을 역행하며 오지 않을 미래에 몸과 마음을 두었다. 초록이 올라오는 새하얀 봄에 꽃향기를 맡는 것이 사치였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유유히 구경하며 걷는 일이 금지였다. 그러한 사소한 감각에서 오는 기쁨은 절단의 대상이어야 했다. 작은 청춘을 향유하기엔 사치와 같았다. 목표하는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할 일을 해내는 성인이 되어 꿈꾸는 삶을 살라는 목소리를 따라갔다.
‘참자. 고난을 견뎌내고 난 뒤에, 저울로 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행복을 보상받자’
대학 강단으로 들어서고자 끊임 없이 지원서를 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나를 원하는 학교를 만나게해달라는 기도로 채워지는 시간이 한 해, 두 해 늘어났다. 그간 해온 공부와 노력이 무산되지 않도록 매일 나를 채찍질했다. 점차 나의 기도 제목은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게 해주세요로 바뀌어갔다. 손가락에 박힌 굳은 살이 서먹히 갈라지고, 갈라진 살틈사이로 아린 아픔이 느껴질 때, 이제 그만 제대로 된 숨을 쉬고 살고 싶다는 호소가 튀어나왔다. 계절의 역행을 멈추고, 흐르는 계절대로 살아야겠다며 임용을 포기했다.
나는 교육과 한국어, 교수 임용에 필요할것 같아서 배워둔 영어를 조합하여 유학원에 취업했다. 늦은 오후 시간에 출근하여 외국의 현지인을 상대로 유학상담을 했고, 늦은 저녁엔 강단에 올라 언어 수업을 했다. 스무살에 그린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좌절을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스무살의 우연과 결심은, 행운이었을까? 마음의 소리를 따라 간 다짐. 그 소리를 따라 흘러오고, 걸어왔다. 결론의 형태는 다양했다. 배움이기도, 포기이기도, 경로이탈이기도 했다.
인생은 불완전 속에서 완성을 채워가는과정이라 여기고, 내 삶에서 보이는 크고 작은 부족함을 매번 들여다보며 비워진 자리를 원하는 것들로 채워가는 것으로 사는 방식을 택했다. 부지런하게, 할 일을 만들어서, 피곤해도 투정부리지 않고 끊임없이 채워가는 삶. 나의 시간은 온통 다음에 해야할 일들로 짜맞춰 내듯 흘러가고 있었다. 뼈에 새긴 글씨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내가 채운 신념은 멈추기 어려운 굴레가 되어 속도를 내고 있었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행운을 맞이하지 못했을 뿐이고. 내가 정한 방식대로 살면 행복할 거라는 순진한 착각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방식을 멈추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한 여름의 표상은, 굴레가 되었다. 과거보다 아는게 많아진, 똑똑한 나의 상태를 만들어갔지만 행복은 여전히 미지수였다. 내게 없는 청사진을 환상처럼 여기며 착각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굴레를 따라 살아오던 와중에 새로운 모임을 나가게 된 것이고, 그 안에서 한동제도 만날 수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굴레 속에서도, 한동제를 만난건 우연과 행운이다. 그러니 굴레를 멈출 방법을 더욱 모르고 있다.
분명한건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직 나는 다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패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미완의 굴레를 멈출 수 있을까? 멈춰야만 하는 걸까? 어디까지 굴러가야 하는 것일까?
굴레는 내가 품은 의문이자 신념, 두 개의 얼굴.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닌 자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