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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04화

미뤄진 약속

by 슬기




은주네 커플이 결혼을 한다. 지난 번 여행 이후 은주는 나를 아주 친하게 대하며 좋아하던 은주는 한 달 뒤 웨딩드레스를 입는 신부가 된다. 동제와 성혁씨가 안부인사를 나누는 통화를 할 때면, 성혁 씨 옆의 은주는 ‘루나 언니 보고싶어!’ 라며 갖은 애정을 수화기 넘어로 표했다. 동제를 통해 들은 은주와 성혁 씨의 사랑은 재밌어보였다. 은주는 성혁 씨의 온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했다. 원하는 관심과 애정을 눈치보지 않고 요구하며 그 사랑이 채워질 땐 가득 웃는 미소로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은주가 바라는 관심의 크기가 커질 수록 성혁 씨는 바빠졌지만, 서로는 행복해보였다. 은주와 성혁 씨는 자주 싸우다가도 빨리 화해했다. 나는 은주씨의 태도가 부러웠다.


동제와 함께 은주네 커플이 주는 청첩장을 받는 저녁 식사를 하러 왔다.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폴짝폴짝 뛰어오는 은주와 손을 잡고, 그들이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이미 함께 살 집에서 신혼부부로 생활하는 그들은 전보다 친하고 깊은 사이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갑자기 결혼 하는거 아니야? 좀 놀랬어.”

“그렇죠, 형? 저도 이렇게 갑자기 할 줄은 몰랐어요.”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만남이 6개월이 채되지 않았는데 결혼을 한다고 전하니 놀라운 일이었다. 청첩장을 받은 이들의 다른 지인들마저 두 사람의 나이가 어리고 여행을 좋아하는 커플이라 결혼을 짐작하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며, 동제의 말도 익숙하다는듯 대답했다.



“근데, 그냥 하기로 했어요. 결혼을 결심하는 일 자체에, 기를 모아 준비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더라고요.”

“그건 네 생각 아냐? 은주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하하. 그런가? 제 생각이고, 은주는 아닐수도요?”


동제 오빠말이 맞다며, 자기는 그냥 하지 않고 기를 모아서 준비하고 있다며 대답하는 은주가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저렇게 예쁜 미소가 드레스를 입는 날이면 더욱 예쁘게 빛날 것이라 상상했다.


“루나 누나, 동제 형이 결혼하자고 하면 힘껏 튕기다가 하세요. 기를 모으시는 거예요.”

“그럴까요? 기를 얼마만큼 모을까요?”


결혼 속 설렘에 빠진 성혁 씨는 자연스레 나와 동제의 결혼을 묻고 있었다. 온 세상이 결혼으로 보이는 성혁 씨로서는 당연한 전제였을 것이다. 나와 동제는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먼 미래에도 서로가 존재할 것임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이는 결혼이라는 행위를 현실에 끌어내기 위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한동제와 내가 결혼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살 것이며 언제 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지 정해야 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서스럼없이 수면에 올린 후 헤쳐나가야 한다.


“집이 제일 걱정이네. 살 곳이 중요하거든.”


동제는 나긋이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한동제가 집을 걱정한다는 것, 사는 곳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형.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집이라. 저희도 집 걱정이 가장 앞섰어요. 근데 부모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서 살 수 없었을거에요. 아직 저희가 어리니까,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런걸 해나가는 과정 같아요. 당장 할 수 있는걸 시도하고, 안되면 포기하면서, 크고 작은 것들을 하나씩 결정 지어가는거요.”


성혁 씨는 은주와의 결혼을 위해 집을 마련했다. 은주는 성혁 씨의 노력을 보며 연고가 없는 곳으로 따라와 살고 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이 결혼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같이 살기로 결정했고, 확신했다. 여러가지 결정과 포기가 뒤섞여가며 그들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결혼이 인간적인 성숙의 척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의 것을 내어줄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성혁과 은주는 어른스러워졌다.


한 달이 지나, 은주는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걸어갔다. 맑은 가을의 배경은 은주를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돋보이게했다. 버진로드 위에서 성혁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 은주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얼마만큼 사랑해야 저 거리를 걸을 수 있는 것일까? 연애하는 감정과 결혼하는 감정은 진정으로 무게가 다른 것일까? 신부의 드레스와 한껏 올라간 티아라는 전혀 부럽지 않았다. 다만, 한 남자의 손을 잡고 그 곁에서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는 용기가 부러웠다.


“동제야, 은주 어머님 봐봐. 은주와 엄청 닮으셨다.”

“와 정말이네. 근데 은주는 성혁 씨 어머니와도 좀 닮은거 같아.”

“그치? 가족이랑 닮은 사람이랑 결혼한다던데. 그러고보면 성혁씨랑 은주씨도 입모양이 닮았어.”

“맞아. 두 사람 은근히 닮았어. 와. 은주, 오늘 너무 예쁘다.”

“루나 니가 드레스를 입으면 훨씬 더 예쁠거야.”

“정말? 나는 입고 싶은 드레스 따로 있는데.”

“궁금하네, 드레스 입은 모습.”


내가 자신의 가족을 만나면 아주 애교있게 잘 할거 같다고 말하는 동제의 얼굴엔 설렘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동제가 턱시도를 입은 모습이 궁금해졌다. 언젠가 이 사람의 손을 잡고,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가 부부임을 말할 날이 있을까. 성혁씨가 말했던 것 처럼, 그냥 결혼하기로 결심하여,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살 공간에서, 떨어져있는 시간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겹겹이 축적되어 살아갈 그런 날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을까.


집을 걱정하는 동제를 보고 난 이후, 나는 그에게 결혼을 먼저 말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나의 모호한 마음을 그가 꽉 붙잡아주며 걱정할건 없다고 먼저 말해주길 바라기도 했다.


“한 4년이 지나면, 그 땐 집이 생길거야. 그리고 이거….”

“시계네? 예쁘다. 선물이야?”

“응.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준비했어,”


한동제는 동그란 타원형의 손목시계를 나의 왼쪽 팔목에 채워주었다. 시계를 선물하면서, 훗날의 시간을 약속하는 한동제의 모습이 무척이나 애틋했다. 먼 훗날에 우리가 함께 할 것임을, 언약처럼 말하고 증표처럼 채우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게 동제의 최선이자, 나에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약속이었다. 내 손목에 한동제의 시간이 올라오고, 흘러갔다. 이 시계가 멈추지 않고 째깍째각 돌아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손을 맞잡고 남은 생을 함께 살아갈 약속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다음날 부터 성혁과 은주의 결혼식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동제가 짊어진 짐이 무거울거라 생각했다. 그 위로 내가 올라타 있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자주 아픈 나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해보자는 말을 하기 어려운게 분명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그에게, 집이 없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나 스스로 더욱 거세게 미워했다.


한동제가 나에게 당장 결혼을 말하기 어려워 할 때, 나는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리는 예쁜 나이였다. 내가 한동제를 힘껏 도울 수 있는 지혜가 없었을 때, 동제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그의 착한 마음을 보며, 그의 헤진 옷을 빨래하고 주름진 손을 맞잡아 늙어갈 것을 상상했다.


나와 한동제를 닮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살아가기엔, 우리는 아직 어렸다.

헤진 옷을 입고 늙은 얼굴을 마주보며 굽은 등을 가진 노인이 되어 우리가 이렇게 긴 인연으로 살았노라 말하기엔,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결심이 부족해보였다.


오로지 곱기만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우리는,

서로를 상처주지 않으려는 최선으로 각자의 최선을 보였던 우리는,

먼 훗날의 집을 핑계삼아 결혼을 맹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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